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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SC 동아시아도서관 Kenneth Klein 박사의 은퇴에 부쳐 [특별기고: Joy Kim, USC 한국학도서관 관장]

Joy Kim 관장

Dr. Kenneth Klein

미주 한인이민사 사료 발굴과 보존에 공헌을 많이 한 USC 동아시아도서관장 케네스 클라인 박사가 6월 말에 은퇴하게 되었다. 이를 계기로 거의 40년에 걸친 그의 한국 관련 노력과 공적을 기록으로 남기고 싶어 이글을 쓴다.

 

LA 한인타운의 토박이

 

클라인 박사는 토박이 LA 출신으로 한인타운8가와 버몬트 근처에서 나서 자랐다. 결혼 후에도 8가와 9가 사이 마리포사에서 살았으므로 1950-1980년대의 한인타운의 변화와 발전을 직접 목격하고 경험한 산 증인이라 할 수 있다.  클라인 박사는 후버초등학교, 버질중학교, 벨몬트고등학교를 졸업 후 UCLA 에 진학해 역사학 학사, 중국사 박사 학위를 취득했고 1983년엔 문헌정보학 석사학위까지 받았다. 그 후 1983년 부터 USC 도서관에서 38년간 동아시아도서관 관장으로 근무하며 한국학 진흥과 재미한인이민사 보존에 많은 노력을 기울여 USC 가 미주 내 주요 한국학 센터로 부상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USC 한국학도서관 설립 www.usc.edu/korea

 

USC 한국학도서관 (Korean Heritage Library) 은 클라인 박사가 USC에 부임한지 3년 후인 1986년 설립되었다. 이 과정에서 클라인 박사가 중추적 역할을 한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그 후 본 도서관이 전례 없는 빠른 성장을 할 수 있었던 것도 클라인 박사의 적극적인 지원 때문에 가능했다. 북미주에서 50여개의 대학이 중국, 일본 자료를 중심으로 동아시아도서관을 운영하고 있는 반면, USC만 유일하게 한국학 장서가 핵심 역할을 하고 있다. 평균적으로 북미 대학 동아시아 도서관 장서는 중국자료60%, 일본자료30-35%, 한국자료 5-10%로 구성된 데 비해, USC 동아시아도서관만 이례적으로 한국학 자료가 50% 가까이 된다.  뿐만 아니라 USC 의 중국어, 일본어 자료는 “장서 Collection”이라고 부르는 반면 한국자료만 “한국학도서관Korean Heritage Library” 이라는 격상된 이름을 갖고 있는 사실에도 USC 한국학도서관의 특별한 위상이 나타난다.  이 전세계에 유례없는 현상은 LA 한인들의 적극적인 후원 뿐 아니라 클라인 박사의 지원이 없이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도산 안창호 가족 가옥 발견 및 보존

 

LA 한인이민사 전문가인 클라인 박사에 의하면 USC 와 한인사회의 각별한 인연은 일본의 제국주의 침탈을 피해 LA 로 망명해 온 초기의 독립지사들이 USC 인근에 정착해 한인타운을 형성하기 시작한 1900년대 초 부터 시작됐다.  한국에서 선교사 생활을 하고 돌아온 Florence Sherman 부인이 1890년대에 USC 인근에 Korean Mission House 를 설립해 한국 학생들의 유학을 돕기 시작하면서 신흥우, 임영신 등이 USC에서 공부하게 되었다. 초창기 한인들은 LA Bunker Hill 지역에 모여 살았으나 인구가 늘면서 점차 USC 인근으로 이주하기 시작했다.  샌프란시스코에 있던 국민회가 1937년 LA로 이사올 때 USC근방 현재의 위치에 정착한 것도 그와 무관치 않을 것이다. 그 중 도산 안창호 가족도 있었는데 그들이 1937년 부터 1946년 까지 거주한 임대주택이 USC  소유였다는 사실을 아는 이는 그리 많지 않다. 말하자면 USC가 안창호 가족의 임대주였던 셈이다. 도산이  중국 등  해외에서  독립 운동에 헌신하는  동안  부인  혜련 여사는 그 집에서   5남매를  홀로 키우며  미주 한인들의 독립 운동 본부  역할을 했었다.  이런 역사적  집  을  발굴하여 세상에  알린  사람이  바로 클라인 박사이다. USC 설립 (1880년) 당시엔 그 집이 캠퍼스 밖에 있었으나 점차 학교가 발전, 확장되면서 캠퍼스의 일부로 흡수되어 1986년 발견 당시엔 공대 유학생회 사무실로 쓰고 있었다.  그 후 1990년대 초 공대  새 건물 부지를   마련하기   위해  그 집을 철거할 계획이 세워졌을 때 클라인 박사 와    동료가   합심하여   그 집의 역사적 ,    상징적  중요성을  대학에 알리고 보존을  촉구했다. 그 결과 대학 당국은 그 건물을 캠퍼스 내 현재의  장소로 이전하고 영구 보존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그 후 2004년 대학은 거액의 예산을 투입해 원래   모습으로    복원,  ‘‘Dosan Ahn Chang Ho House’ 란 공식 명칭을 부여하고 2006년 부터 USC Korean Studies Institute (한국학연구소) 로 사용하고 있다.

 

USC Korean American Digital Archive (미주한인전자기록) 설립

 

클라인 박사는 한인 이민사 자료의 발굴 및 보존에 미국학계의 독보적인 인물이다. 그가 지난 35년 간 많은 정성과 노력으로 구축한 USC Korean American Digital Archive (미주한인전자기록관)은 미주한인 관련 사료 최고의 보고이다. 이 기록관이 제공하는 자료는 미주 내 학자 뿐만 아니라 한국에서도 활발히 이용되어 여러 책, 연구논문, 다큐멘터리 등에 기여했다.  클라인 박사가 맨 처음 발굴한 이민사 자료는 일제에 맞서 싸우기 위해 1920년대 중가주 레드우드시와 윌로우스에 있던 한인항공학교에서 훈련 받은 비행기조종사들의 사진이었다. 그들의 후손으로 부터 1987-1988년 기증 받은 사진 자료를 조사해1989년 “The Korean pilot training school of Willows”  (Wagon Wheels 29:2 (Fall 1989)) 이라는 기사를 발표했고 USC 도서관에서 관련 전시회도 열었다.  이런 노력이  오랫동안 사장되어 잊혀져 있던 Korean Pilot School 의 역사에 대한 세간의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본국KBS 포함 여러 매체에 클라인 박사가 재발견한 항공학교가 보도된 후 한국의 역사학자, 공군 관련자, 등등 많은 이들이 클라인 박사를 찾아왔다. 그 중 여러 핵심 인사들이 클라인 박사가 발굴, 보존한 자료로 인해 한국의 공군의 역사를 다시 쓰게 되었다고 말했다.  이 자료들의 중요성을 나타내는 최근의 한 예로 올해 김포에서 개관 예정인 대한민국국립항공박물관 (National Aviation Museum of Korea ) 에서도USC 가 제공한 여러 사진이 영구전시될 예정이며 그 중 일부는 조형물로 재탄생하여 건물 앞에 세워질 것이라고 한다.

클라인 박사의 노력으로 USC 미주한인기록관은 수 많은 재미 한인들의 자료를 보유하고 있는데 그 중 몇 예를 들자면 다음과 같다: 정한경, 김난영, 전낙청, 현순, 양은식, 김찬희, 손원태, 김영철, 고원, 조재길, 필립 안, 새미 리, 김영옥, 소냐 선우, 데이빗 현, 로버타 장, Korean American Story.Org, 등등.

대한인국민회 사료

 

대한인국민회 건물에서 2003년에 발견된 자료를  USC가  최근 전산화한 사실은 언론에 여러번 보도 되었지만 그 이전 2001 년 일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즉 재건 공사  전의 국민회 건물은 아무도 돌보지 않아 지붕도 새고 먼지, 더위, 쥐, 벌레 등에 노출된 폐가 상태였다.  그 건물 안 홀 중앙에 있는 테이블 위에 기록물들이 무더기로 방치되어 곰팡이와 벌레에 손상되고 있음을 한 익명의 한인이 USC에 알려왔다. 이 소중한 자료의 보존을 위해 USC는 당시 국민회 건물의 소유주인 나성한인연합장로교회와 양해 각서를 맺고 시급해 작업에 착수했다. 클라인 박사와 동료가 약 5000점의 손상된 자료들을 구출하여 냉동 처리로 벌레들을 박멸한 후 그 자료들을 깨끗이 정리, 복원, 목록하는 데 일년 이상이 걸렸다. 이듬해 2002년 양해각서의 내용 대로 깨끗이 정리한 원본 5000 점을 두 벌의 고해상도 복본 파일과 함께 교회에 반환한 후 해당 이미지는 USC Digital Library에 공개하여 학계 뿐 아니라 후손, 모든 일반인들이 인터넷을 통해 편리하게 이용할 수 있도록 제공하고 있다.

 

그후 2003년에 국민회 건물 재건 공사 중 다락에서 3만여점의 또 다른 미주 한인들의 독립운동 관련 기록 (1907-1947) 이 발견되었다.  USC는 이미 전 해에 5000점의 비슷한 자료를 더 나은 상태로 정리하여 전자화된 복본과 함께 돌려준 것 처럼 새로 나온 자료도 무료로 정리하기를 제안했다. 그로부터 16년이 지난 2017년 9월 말에 자료를 인계 받았으나 약 3만 점의 손상된 자료를15개월 안에 작업을 마쳐야 한다는 어려운 조건이 따라왔다.  이 일을 기간 안에 완수하기 위해 클라인 박사가 겪은 고초는 필설로 설명하기 어렵다.  처리 가능한 상태의 18,000면을 추려 아카이브 규격에 맞춰 고해상도로 스캔하는 작업을 마치고 벌의 전자 이미지 본과 함께 정리된 원본을 계약기간 안에 돌려줄 수 있었던 것은 전적으로 그의 희생적인 노력의  결과이다.  이 불가능에 가까운 일을 묵묵히 완수한 후 지병에서 회복하느라 몇 개월 병가 까지 내야 했다.  클라인 박사의 희생적인 노력으로 인해 이 중요한 사료를 손쉽게 이용할 수 있게 되었음을 후대의 학자와 후손들이 오래 기억할 수 있으면 좋겠다.

 

이와 같이 클라인 박사의 37년 간의 숨은 노력은 전 세계의 학계 뿐 아니라 미주 한인 후손 대대로 물려줄 수 있는 찬란한 사회적 유산으로 남게 되었다. 클라인 박사는 매우 겸손한 선비적 인격을 지닌 인물로서 자신의 공적을 드러내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의 은퇴를 계기로 한인 사회가 그에게 감사하는 마음을 표현할 수 있도록  공적 기회를 만들 수 있기를 바란다.

2020년 6월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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