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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 대한인국민회 기념관을 가다

재미동포들 배경에 조국 독립을 위해 헌신한 선열들이 있어

“대한인국민회는 미주지역 독립운동의 1번지이자
독립운동의 산실입니다. 그러한 중요한 자리에 있는 대한인국민회지만 그간 널리 알려지지 않았습
니다. 하지만 2년 전 광복절을 앞두고 고국의 모 방송프로그램인 ‘무한도전’ 이 다녀간 뒤 방문자들
도 꾸준히 늘고 있습니다.”
이는 어제(8일, 이하 현지시간) 방문한 미국 로스앤젤레스의 대한인국민회기념관에서 만난 배국희
이사장이 한 이야기다. 배국희 대한인국민회기념재단 이사장은 무더위에 찾아간 고국의 기자 일행
을 반갑게 맞이하면서 그렇게 운을 떼었다. 그리고 말을 이어갔다.

▲ 대한인국민회기념재단 배국희 이사장이 기념관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지난번에는 유모차를 끌고 온 아기엄마가 전시관을 찬찬히 둘러보고는 선열들의 독립정신에 자부
심을 느끼며 한국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찾게 되었다고 해서 보람을 느꼈습니다. 우리 재미동포들의
배경에는 조국의 독립을 위해 헌신한 선열들이 계셔서 든든합니다.”
기자는 미주지역에서 활약한 여성독립운동가들의 발자취를 찾아 8일부터 17일까지 신한국문화신
문 양인선 기자와 함께 로스앤젤레스를 방문하여 첫 번째로 제퍼슨거리에 있는 대한인국민회를 찾
았다. 아침저녁에는 약간 선선하지만 한낮에는 고국의 무더위와 버금가는 날씨 속에서 기자 일행을
이날 대한인국민회로 안내해준 사람은 한인박물관 민병용 관장이었다.

▲ 미주지역 독립운동사에 관한한 독보적인 저술가인 언론인 출신 민병용 한인박물관장이 미주지역의 독립운동사를 자세히 설명해주고 있다

민병용 관장은 언론인 출신으로 40여 년간 로스앤젤레스에 살면서 미주지역의 독립운동사와 이민
역사를 집필한 저술가이자 대한인국민회기념재단의 이사로 활약하고 있는 분이다. 민병용 관장은
손수 운전하여 기자 일행을 대한인국민회로 안내해주었다. 뿐만 아니라 미주지역 독립운동의 산 역
사를 장시간에 걸쳐 설명해주었다.
“대한인국민회 총회관은 1937년 샌프란시스코에서 로스앤젤레스로 이전했으며 1938년 4월 17일
총회 건물을 새로 지었습니다. 이곳이 원래 대한인국민회 정문입니다만 정문 바로 앞 도로변에 철
책을 치는 바람에 정문 구실을 못하고 있지요” 민병용 관장은 한낮의 폭염 속에서도 대한인국민회
전시관 밖으로 기자 일행을 안내했다. 그리고는 현재의 대한인국민회 건물이 샌프란시스코에서 이
곳으로 온 유래를 시작으로 실내의 4개 전시관까지 꼼꼼하게 안내해주었다.

▲ 원래 이곳이 대한인국민회 정문이지만 도로쪽에 철책이 들어서서 정문 구실을 못하고 있는 실정이라는 설명을 하고 있는 민병용 관장

▲ 110년의 역사에 견주면 작은 규모라고 할 수 있는 대한인국민회 기념관 전경, 원래는 전경 사진 왼쪽 모퉁이로 돌아간 곳이 정문이지만 도로쪽 철책이 있어서 현재는 주차장 선이 그어진 쪽에 작은 문을 기념관 정문으로 쓰고 있다.

▲ 미주 이민사회의 어머니교회인 나성한인연합장로교회 (1938년) 는 대한인민국회 기념관을 마주하고 있다.

대한인국민회는 1909년 2월 1일, 조국 광복을 위해 샌프란시스코에서 창립했다. 그 뒤 1910년 5
월 10일 대동보국회가 참가하여 대한인국민회로 이름을 바꾸었다. 중앙총회는 북미지방 총회와 하
와이 지방 총회, 원동지방 총회를 두었는데 미국, 멕시코, 쿠바, 중국, 러시아 등 모두 116개 지회를
두는 등 회원이 많을 때는 850명까지 있었다.
대한인국민회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은 도산 안창호 선생이다. 도산 안창호 선생은 1908년 장인
환과 전명운이 친일파 미국인인 스티븐스를 저격했던 사건을 계기로 미국의 한인단체가 통합되어
설립한 대한인국민회에서 중앙총회 회장을 맡아 활약했다. 미주지역의 독립유공자를 배출한 독립
운동관련 기관과 단체를 보면, 대한인국민회 127명, 흥사단 39명, 동지회 17명, 비행사양성 11명,
OSS, NAPKO 10명, 재미한족연합위원회 7명, 박용만군사학교 6명, 대한여자애국단 6명, 상해임시
정부참여 5명 등으로 대한인국민회가 127명으로 가장 많은 독립유공자를 배출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대한인국민회는 1919년 3.1만세운동 이후 더욱 활기를 띠게 되었는데 독립자금을 모아 상해 임시
정부에 보내는 일을 주로 맡았으며 한글과 영문판 <신한민보> 발간, 태극기 제작 배포, 맹호군단을
남가주와 북가주에 두어 한인증명서를 발행하는 등 조국 독립을 위한 활발한 활동을 했다.

▲ 110년의 역사를 간직한 미주 독립운동의 1번지, 대한인국민회 기념관 내부를 돌아보는 양인선 기자

2009년 2월 1일 대한인국민회는 창립 100주년을 맞이하여 대한인국민회기념관 안의 전시물을 국
가보훈처와 독립기념관의 지원으로 새롭게 바꿨다. 그리고 이곳이 미주 독립운동의 1번지인 만큼
선열들의 독립정신을 이어가는 역사의 현장으로 활용하고 있다.
내년은 3.1만세운동 100돌이요, 상해임시정부 탄생 100돌이 되는 해지만 이곳 로스앤젤레스에 자
리한 대한인국민회는 이 보다 앞선 창립 110년의 역사를 간직하고 있다. 모 방송국의 ‘무한도전’이
라는 프로그램 덕으로 인지도가 그나마 조금 높아졌다고는 하지만 역설적으로 말하면 그 만큼 이
역사적인 현장이 미국 내에서는 물론이고 고국에서도 그다지 주목 받아오지 못한 것은 아닌가하는
생각이 들어 안타까웠다.

대한인국민회 기념관을 둘러보고 나오면서 미주지역 최고(最古)의 독립운동사 현장인 이곳이 동포
들에게는 든든한 조국독립의 장이요, 자라나는 후손들에게는 생생한 교육의 현장으로 길이 기억되
는 공간이 되길 바라는 마음 간절했다.

 

[신한국문화신문= 로스앤젤레스 이윤옥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