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국지사 강명화, 다섯 아들과 독립운동 벌이다
훌륭한 아버지에게는 자랑스런 아들이 태어난다. 미주의 5부자 독립유공자 탄생 주인공은 바로 평양에서 다섯 아들과 함께 하와이 노동이민 길에 오른 강명화 가족이다. 하와이 사탕수수농장에서 노동자로 한 삶을 살기보다는 또다시 큰 꿈을 갖고 샌프란시스코로 삶의 터전을 옮기면서 시작된다. 이는 일찍기 평양에서 개화사상을 가졌고, 강명화의 첫 선택은 하와이 이민길에 오르는 일이였다. 그리고 또다시 독립운동의 더 큰 세상인 미주 본토로 세 아들과 함께 이주하는데도 주저함이 없었다. 그리고 나라 잃은 탄식만을 하기에 앞서 도산 안창호가 설립한 공립협회에 맏아들 강영대와 함께 가입을 했다. 독립운동을 하는데 아버지와 아들이라는 벽을 두지 않았다.
다시 임시정부임을 표방한 대한인국민회 탄생에도 두아들과 함께 적극적으로 참여한 것도 자랑스런 아버지 강명화의 의지였다. 강명화는 1905년 10월7일 공립협회 샌프란시스코 지방회에 처음 가입을 했다. 공립협회와 하와이 합성협회가 통합할 때에는 국민회 규칙 기초위원으로 선정되었다. 그리고 대한인국민회 북미지방총회 서기까지 맡았다. 강명화는 1911년 11월22일 대한인국민회 리버사이드 지방총회에서 총회장으로 최고의 자리까지 올랐다. 이에 앞서 2월에는 샌프란시스코에서 대한인국민회 부회장(총회장 문양목)을 맡아서 그 책임을 다했다. 샌프란시스코와 리버사이드를 오가며 살면서 대한인국민회에 참여하는 한편, 인삼장사로 시카고 등 미국의 주요 도시를 다니면서 독립운동의 필요성을 알렸다.
강명화는 미국에 노동이민을 온후 고향인 평양 땅을 2번이나 밟은 적이 있다. 1913년과 그후 둘째아들 강영소 아들인 강오산이 5살인 1918년으로 알려지고 있다. 시카고에서 식당을 경영한 네아들과 노후를 보내면서도 대한인국민회, 그리고 독립운동을 위한 재정 후원만은 평생한결 같았다. 하와이 사탕수수 농장의 초기이민자로 미주 최고의 독립유공자 가족을 탄생시킨 초기 노동이민자 강명화. 그는 1933년 3월 향년 66세로 미주에서의 삶을 마쳤다. 오늘 시카고 공원묘지에 잠들어 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강명화 독립유공자의 다섯 아들의 사진은 발굴해 냈지만 꼭 찾아내야만했던 애국지사 강명화의 인물사진만은 끝내 찾지를 못했다. 한국에 있는 후손과 시카고 지역에 연락을 취했지만 아쉬움이 끝내 남아 있다. )
성명 : 강명화(姜明化, Myung Wha Kang)
훈격(연도) : 애족장 (2012)
운동계열 : 미주방면
출생지 : 평안남도 증산
생존기간 : 1868 ~ 1933. 3월
미주 민족운동단체인 공립협회에 가입하여 활동했다. 1909년부터 1933년까지 대한인국민회 북미지방총회장, 중앙총회 대의회 의장 등을 역임하면서 국민회를 최고의 민족운동기관으로 이끄는 활동을 했다. 1905년 5월29일 네 아들 강영대, 강영소(후일 대한인국민회 총회장역임), 강영상, 강영각 등 함께 차이나호로 하와이에 도착하여 에와농장에서 일했다. 같은 해 가을 미 본토로 건너온 뒤, 1905년 10월 7일 공립협회 샌프란시스코지방회에 가입했다. 1908~1909년 공립협회 총회 서기로 활동하는 한편, 1909년 1월 북미 공립협회와 하와이 합성협회가 합동 발기하여 국민회로 통합을 의결하자, 최정익, 이대위 등과 함께 공립협회를 대표하여 국민회 규칙기초위원으로 선정되어 국민회 정관을 만드는데 공헌했다.
1909년 2월 국민회가 창립되자, 공립협회는 북미지방총회로, 합성협회는 하와이지방총회로 개편되었다. 이에따라 강명화 역시 북미지방총회 서기로 임무를 수행했다. 1911년 대한인국민회 북미지방총회 부회장과 대의회 의장, 1912년 북미지방총회 총회장에 선임된 그는 대한인국민회를 해외한인의 최고기관으로 자리잡게 하는 한편, 시베리아지방총회, 만주지방총회, 수청지방 총회를 비롯하여 멕시코지방회까지 건설하는 등 왕성한 활동을 벌이며 민족운동을 전개했다. 정부는 2012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