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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 언

문필가이자 평생 국민회 맨이며 독립운동가인 홍 언

홍언홍언은 필명이 동해수부(東海水夫)이다. 신한민보와 대도(大道)에 수많은 글을 발표한 문장가요 시인이자 독립운동가이다. 평생을 국민회 맨으로 살았다. 별명이 미스터 국민회였다. 미주 초기이민역사 연구가인 방선주 박사는 홍언을 다
음과 같이 평가했다. 첫째 미주에서 40년간 언론계에 몸담으면서 독립의식 고취에 힘썼다. 둘째 평생을 국민회를 위해서 살았다. 셋째 역사가였다. 미주 한인역사에 가장 정통한 인물이었다. 넷째 문인이다. 그가 남긴 시만도 5백편이 넘는다. 다섯째 김삿갓이다. 미주와 캐나다, 멕시코, 페루, 칠레등을 두루 다녔다. 여섯째 북미한인과 북미화교의 교량역이었다. 중국인 신문에 글을 싣고, 화교를 방문하며 모금을 했다. 일곱째 원만한 인격의 소유자이다. 홍언은 흥사단 단우 7번이다. 1913년 5월13일 샌프란시스코에서 흥사단을 창단할 때 경기도 대표로 참여했다. 그리고 대한인국민회 핵심간부로 이대위, 백일규와 함께 신한민보를 이끄는 중추적 역할을 담당했다.  1951년 71세로 로스앤젤리스에서 별세했다. 로즈데일 묘지에 안장되었다가 1997년 대전 국립묘지로 이장되었다.

성명 : 홍 언 (洪 焉)
훈격(연도) : 독립장(1995)
운동계열 : 미주방면
출생지 : 서울
생존기간 : 1880. 2.27 ~ 1951. 3.25

서울 사람이다. 1902년 중국으로 건너가 2년 동안 양지사무소에서 사무를 보는 한편, 1903년 간도의 한 사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다가 1904년 귀국했다. 1905년 넷째형 경표와 함께 하와이로 이민을 왔다. 하와이 노동이민 후 가와이섬 막가윌리 사탕농장에서 노동을 하다가 1906년 6월 송건 등과 함께 자강회를 조직했다. 이듬해인 1907년 9월 동포들의 실력 양성과 교육 장려를 위해 활동했다. 1907년 9월 하와이 각 지방에 분립되었던 24개 단체를 하나로 통합하기 위해 대표자 30명이 호놀룰루에서 합동발기대회를 개최하여 하와이의 모든 단체를 망라하는 한인합성협회를 조직했다. 그리고 10월 기관지 「한인합성신보」를 창간하자 기관지 주필로 임명되어 1909년 1월까지 1년 3개월 동안 활동했다. 홍언은 1909년 2월 하와이의 한인합성협회와 미주의 공립협회가 해외 한인의 통일기관을 설치하기 위해 합동하여 대한인국민회를 조직하자 국민회 하와이지방총회 기관지인 「신한국보」의 주필로 임명되었다.1911년 11월에는 샌프란시스코에 위치한 국민회 북미지방총회 기관지인 「신한민보」주필이 되었다. 1908년부터 약 4년 동안 신문을 제작, 발행하여 조국의 국권회복과 한인동포들의 안녕 보장 및 민족교육 장려, 문맹퇴치운동, 애국사상 고취를 위해 헌신했다. 1912년 11월 해외 한인의 최고통일기관인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가 결성되자 국민회 만주지방총회 대표 대리로 참석하여 임시정부의 역할을 수행하는데 노력했다. 또한 1913년 5월에는 샌프란시스코에서 송종익 등 8명과 함께 흥사단을 창립하여 흥사단 창립발기 위원 겸 경기도 대표로 선정되었다. 그 후 1919년 3월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 부회장으로 선출된 그는 조국의 3·1독립선언 소식을 듣고 재미동포를 총동원하여 독립운동을 후원하고자 미주·하와이·멕시코 재류동포 전체대표회를 개최하고, 화교위원으로 임명되어 중국인 사회에 한국의 독립사상 선전 사무를 담당했다. 홍언은 1920년 대한인국민회 북미지방총회 서기 및 「신한민보」편집인으로 캘리포니아주를 비롯한 서부지역을 돌아다니며 화교들을 상대로 연조(捐助) 청구활동을 전개하여 국민회 운영자금에 큰 도움을 주었다. 이와같은 그의 활동에 따라 구미위원부에서도 화교를 상대로 하는 수입의 잠재력을 인식하고 1920년 6월 그를 구미위원부 화교위원으로 임명했다. 이에 따라 1921년 1월 캐나다 서부지역을 순회한 것을 비롯하여 6월에는 파나마, 에쿠아돌, 페루, 칠레 등 중남미 화교들을 방문하는등 1년 6개월 간 자금후원 활동을 전개하여 임시정부의 재정을 마련하는데 큰 공헌했다. 1922년 6월 샌프란시스코로 귀환한 그는 다시 국민회 순행위원으로 캘리포니아 각지를 다니며 국민회에 대한 지지를 호소하고 회비와 연조를 청구했다. 1923년 북미 대한인국민회 총무로 선임되어 회의 재정확보를 위해 노력하는 한편, 1924년에는 김현구, 최진하 등과 함께 이문회라는 문예창작 그룹을 조직하여 문재(文才)를 발휘했다. 또한 1926년 6월 미국을 떠나 약 1년간 멕시코를 돌아다니며 잡화와 인삼행상을 했다. 1928년 이후에는 민족주의 노선을 지지하고 김구의 한인애국단을 후원했다. 1931년 북미 대한인국민회 부회장으로 선임된 그는 중국인이 발행하는 신문을 통해 한중 합작을 제창하며 항일투쟁의식을 고취시키고, 고려통신사 명의로 한국혁명 운동과 인물들을 소개하여 미주와 해외 각지에 있는 중국 화교들로부터 큰 칭송을 받았다. 『미국화교사』에도 그의 이름이 기록되었다. 이에 따라 1933년 5월 김규식이 샌프란시스코를 방문했을 때, 그를 주선하여 중한민중대동맹 삼번시지부주비처를 조직하게 하고 삼번(三藩)주 샌프란시스코의 중국인 지도자들과 김규식을 회동하게 하는 등 화교계에 상당한 영향력을 발휘했다.홍언은 1935년부터 1936년 중국 화교들의 초청으로 화교사회를 순방했다. 1936년 5월 분열된 북미지역 한인민족운동단체의 부흥을 위해 소집된 각 지방 대표자회의에 참석하여 북미 대한인국민회를 재건하고 미주 한인 사회의 부흥과 항일운동, 임시정부의 재정 후원을 도모했다. 또한 1940년 그의 나이 60세가 되던 해, 28년만에 신한민보의 주필이 되어 3년동안 그의 문재를 발휘했다. 1941년 4월20일 하와이 호놀룰루에서 미국내 각 한인단체 대표들이 모여 해외한족대회를 개최하고 8월 미주내 모든 단체들을 통합한 재미한족연합위원회가 조직되어 활동했다. 1943년 9월 이승만 계열의 동지회가 재미한족연합위원회를 탈퇴하여 1944년 6월 독자적으로 외교위원부를 설치하여 활동하자 재미한족연합위원회도 별도의 외교사무소를 개설하고 외교사무를 전개했다. 이와같은 사태에 대해 대한민국임시정부에서 8월 외교위원부를 새롭게 개조할 것을 명령하자, 그해 10월 로스앤젤리스에서 미국과 하와이의 17개 단체중 동지회 계열의 4개 단체를 제외한 13개 한인단체가 대표회를 개최했다. 이 대회에 참석하여 서기로 선출된 홍언은 주미외교위원부의 개조 인선작업에 참여했다. 1945년 다시 신한민보 주필에 임명된 그는 4년동안 활동을 펼치다. 1951년 3월25일 로스앤젤리스에서 별세했다. 정부는 1995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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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을 통한 독립운동에 앞장 선 홍언. 중가주에서 노동할 때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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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언(호는 동해수부)이 도산의 맏딸 안수산의 대학입학을 축하하며 써준 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