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시정부 외무차장 역임, 하와이서 독립기금 모은 현 순 목사
성명 : 현 순
훈격(연도) : 독립장(1963)
운동계열 : 임시정부
출생지 : 서울
생존기간 : 1880.2.28 ~ 1968.7.11
서울 사람이다. 1903년 하와이로 와서 기독교회에서 성경을 연구하고 1911년 귀국하여 선교활동을 했다. 1919년 3·1독립운동을 계획하여 이승훈, 유여대, 최린, 함태영, 신홍식 등과 함께 협의 광무황제 기일 전인 기미년 3월 1일에 만세시위를 벌이기로 협의했다. 그리고 문서를 평화회의 주도자인 미국 대통령 윌슨에게 보내어 세계 개조와 동양 평화유지에 대하여 한국의 독립이 필수 불가결하다는 서한을 보내기 위해 상해로 밀파되었다. 3·1독립운동 이후 많은 독립지사들이 상해에 모이자 불란서조계 보창로에 임시사무소를 개설하고 총무가 되었다. 현순은 이동녕, 이시영, 조완구, 한진교, 김규식, 신현창 등 독립운동가들과 함께 모여 임시정부 수립을 위한 제반사항을 토의, 1919년 4월 10일에 임시의정원 회의를 열어 임시정부의 발족을 보게 되었다. 그는 임시정부의 외무차장이 되었다가 정부의 조직개편으로 외무위원에 임명되었다. 같은 해 4월 23일에 현순은 제2회 임시의정원 회의에 의원으로 참석하였으며, 또한 서울의 국민대회에서는 한성정부의 평정관으로 임명되기도 했다. 같은 해 9월 2일에는 러시아 만주지역에 김성겸과 함께 파견되어 특파원으로 활동했다. 9월 29일에는 대한기독교연합회 대표로 김병조, 손정도, 조상섭, 정인과 등과 청원서를 작성,서명하여 국제연맹회의에 제출하여 한국의 독립을 진정 하기도 했다. 11월 14일에는 임시의정원 의원을 사임하고, 대한적십자회 상의원으로 선출되었다. 임시정부 서울지역 조사원에 임명되어 국내 실태를 조사 보고했다. 1920년 4월 그는 구미위원부 위원장 대리로 미국 워싱턴에 부임하여 당시 임시정부 외무총장인 신익희에게 그활동사항을 다음과 같이 보고했다. ⑴ 1921년 3월에 호주에서 개최 예정인 만국신문기자대회에 대표를 파견할계획임. ⑵ 손병희 등 47명의 민족대표는 3년 내지 1년형을 받게 되었음. ⑶ 훈춘사건의 내용 등, 1921년 김규식이 이승만의 뒤를 쫓아 상해로 건너가자 현순은 서재필, 정한경과 임시정부를 대표하여 대미외교 등을 추진하는일에 마찰을 일으키게 되었으므로 임시정부에 주미대사로 임명하여 줄 것을 요청했다. 그는 재미교포들의 신망을 얻지 못하고 1921년 4월 26일 그 직을 면직하기에 이르렀다. 1922년 상해에서 국내외 독립운동 단체들 간에 알력으로 독립운동의 추진이 어렵게 되자 그는 안창호, 여운형, 도인권, 홍진, 차이석, 김구, 이유필, 노백린, 이시영 등이 조직한 시사책진회에 가입하여 분규를 종식시키고 통일과 단결을 이루기 위하여 노력했다. 이후 주로 하와이지방에 거주하면서 임시정부 지원에 진력했다. 1934년 9월에는 임시정부의 재정지원을 위하여 “인구세” 또는 “애국의연금”을 거출하여 송금했는데, 현순은 하와이의 가와이섬을 중심으로 이일을 적극지원했다. 뉴욕에서는 이진일, 시카고에서는 김경, 호놀룰루에서는 이용직 등이 이일을 맡아 활동했다. 정부는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