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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장호

독립군 공군이 되기 위해 조종사 훈련 받은 한장호

한장호한장호는 일생을 한국 독립을 위해서 싸웠고 미국에서 한국독립군 공군을 양성하는 역할을 맡았다. 조국에서 3.1만세운동이 일어난 1919년 북가주 레드우드비행학교에서 1년반동안 비행기 조종법을 배웠다. 쌀농사로 성공한 김종림이 한인 젊은이 7 ~ 9명에게 공군 훈련을 받도록 계약하고 교육비용을 부담했기 때문에 가능했다. 이때 한장호가 레드우드비행학교와 교육훈련 계약서를 맺었다. 그는 일찌기 항공기 조종사가 되기로 결심했다. 일본 도쿄 천황궁을 폭파하겠다는 꿈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독립군의 우수한 공군력으로 막강한 육군을 자랑하는 일본을 제압할 수 있다고 믿었다. 한장호는 시카고에서 식당을 경영했고, 이때에도 독립기금을 냈다. 프란시스 한과의 사이에 리차드 한을 두었다. 그는 미국 심장학계에 큰 업적을 남긴 의학계 선구자이다. 샌프란시스코 밀벨리에서 100세인 1994년 2월6일 별세했다.

성명 : 한장호
훈격(연도) : 애족장(1995)
운동계열 : 미주방면
출생지 : 평안남도 강동
생존기간 : 1893. 5. 1 ~ 1994. 2. 6

평안남도 강동사람이다. 평양에서 출생한 그는 1913년 민족운동에 투신하기 위해 고국을 탈출하여 중국 상해로 건너갔다. 이후 1916년 3월 미국행을 결심하고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했다. 당시 상항한인감리교회 목사였던이대위 목사의 도움으로 이민수속을 밟고 미국에 입국하였으며 입국 후 4월에 해외 최고의 통일기관이었던 대한인국민회 북미지방총회회원으로 가입하여 조국의 독립운동을 적극 후원했다. 그 후 캘리포니아주 맨티카로 이주하여 농장인부로 일하던 중, 같은 농장에서 함께 일했던 이삼성, 오박만, 성복수 등과 더불어 조국의 독립을 위한 활동계획을 수립하고, 대농장주 김종림의 재정적 후원을 받아 한국독립군 공군부대 창설을 구체화했다. 그리하여 1919년 캘리포니아 레드우드시에서 한국최초의 한국독립군 공군부대(Korea Independent Air Force)를 창설하고 약 1년반 동안 비행조정법 등 구체적인 기술교육과 비행훈련을 받는 한편, 전투에필요한 전폭기를 구입하기 위해 미국 정부와 기관 등에 재정적 후원을 요청하였으나 무위로 끝나고 말았다. 이후 1920년 2월 대한민국임시정부 군무총장 노백린 등이 중국내 항일독립운동을 후원할 목적으로 미국 캘리포니아주 윌로스에 비행사양성소를 설립하고 김종림이 비행기 2대를 구입하여 기증했다. 한장호는 비행사양성소 교관으로 임관하여 50여명의 학생들에게 둔전병식 군대 교련과 비행훈련을 가르치면서 항일무장투쟁의 선봉이 될 공군사관생도들을 배출했다. 정부는 1995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한장호는 공군이 되어서 일본 천황궁을 폭격하겠다는 꿈을 가지고 레드우드 비행학교에 들어갔다. (중앙일보 1994년 2월10일자)

한장호는 공군이 되어서 일본 천황궁을 폭격하겠다는 꿈을 가지고 레드우드
비행학교에 들어갔다. (중앙일보 1994년 2월10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