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민족혁명단 대표로 외교업무를 담당한 최능익
성명 : 최능익
훈격(연도) : 애국장(1995)
운동계열 : 미주방면
출생지 : 평안남도 강서
생존기간 : 1889. 11.24 ~ 1976. 12.21
평안남도 강서 사람이다. 1916년 1월 조국의 독립과 항일투쟁을 목적으로 미국으로 망명을 왔다. 윌로스지방 대학에 재학 중, 1919년 9월 샌프란시스코에서 한인학생친목회 유학생대표회가 개최되었다. 각 지방에 산재한 학생들과 학생회를 규합하고 한인학생 전체를 대표할 통일기관을 결성하기로 합의했고, 그 목적에 찬동하여 1920년 4월 윌로스지방 대표로 학생총회 결성대회에 참가했다. 총회 결성발기자회를 조직하고, 미주 학생들의 친목과 항일민족의식 고취에 노력했다. 1920년 2월 대한민국 임시정부 군무총장 노백린 등이 중국내 항일독립운동을 후원할 목적으로 캘리포니아주 윌로스지방에 비행사양성소를 설립하자, 학생으로 입소했다. 50여명의 학생들과 함께 둔전병식 군대교련을 받으면서 항일무장투쟁 의지를 굳건히 했다. 최능익은 1939년 10월 로스앤젤리스에서 변준호 등과 함께 중국피난민후원회를 조직하고, 1941년 2월에는 후원회를 변경하여 조선의용대 미주후원회를 조직하고 조선혁명당 소장파들이 중국 한구에서 결성한 조선의용대의 중국군대 후방공작을 후원했다. 이후 1942년 5월 조선의용대가 한국광복군에 편입함에따라 1943년 1월 조직을 조선민족혁명당 미주지부로 개칭했다. 9월 기관지 「독립」을 창간하여 중국내 김원봉계열의 정치운동노선을 적극 후원 지지했다. 한편, 1941년 4월 20일 호놀룰루에서 미국내 각 한인단체 대표들이모여 해외한족대회를 개최하고 8월 미주내 모든 단체들을 통합한 재미한족연합위원회를 조직하자, 그가 속한 조선의용대 미주 후원회 역시 재미한족연합위원회에 가입하여 활동했다. 그러나 1943년 9월 이승만 계열의 동지회가 재미한족연합위원회를 탈퇴하여 1944년 6월 독자적으로 외교위원부를 설치하고 활동하자 재민한족연합위원회도 별도의 외교사무소를 개설하고 외교사무를 전개했다. 이와 같은 사태에 대해 대한민국임시정부에서 8월 외교위원부를 새롭게 개조할 것을 명령하자, 그 해 10월 로스앤젤리스에서 미국과 하와이의 17개 단체 중 동지회 계열의 4개 단체를 제외한 13개 한인단체가 대표회를 개최했다. 대회의 조선민족혁명당 미주지부 대표로 참석한 그는 주미외교위원부의 인선작업에 참여했다. 정부는 1995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조선민족혁명단의 주역들. 왼쪽 박상렵, 한길수(중앙), 최능익. (1940년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