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과 시카고 국민회에 참여하며 독립금 낸 천세헌
성명 : 천세헌
훈격(연도) : 독립장(1995)
운동계열 : 미주방면
출생지 : 경상북도 상주
생존기간 : 1879. 5.17. ~ 1945. 6.14
경상북도 상주 사람이다. 1885년부터 1901년까지 경상북도 선산에서 한학을 공부했다. 1902년 상경하여 외국어학교 일어과에 입학하여 수학하다가 1903년 하와이의 사탕농장 노동자 모집 때 지원하여 하와이로 왔다. 하와이 이주 후 약 3년간 사탕수수농장에서 노동을 했고 1907년부터는 상업에 종사했다. 그 후 1910년 뉴욕으로 이주하여 해외 한인 최고 통일연합기관인 대한인국민회 북미지방총회 뉴욕지회에 가입하여 조국의 독립운동과 한인교포들의 민족교육 실시를 위해 노력했다. 그후 1913년 안창호, 송종익 등 8명이 민족의 장래에 동량이 될 인재 양성을 위해 창립한 흥사단에 가입하여 활동했다. 1917년에는 대한인국민회 북미지방총회 뉴욕지방총회장으로 선임되어 대한인국민회에 가옥채보상금을 출연하여 회의 운영을 위해 노력했다. 1919년 4월,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에서 독립운동 후원과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선전을 목적으로 필라델피아에서 한인대회를 개최하게 하자, 대회에 참가하여 임시정부의 지지와 후원, 임시정부의 승인 요구, 외교사무소의 설치 등을 결의했다. 그 후 1921년 8월 대한인국민회에서, 같은 해 11월 전후의 군비 축소와 태평양 및 원동정책을 획정할 목적으로 미국 워싱턴에서 5대열강회의를 개최한다는 것을 알고 대한민족대표단을 조직하고국내와 연락하여 대한 인민의 건의서를 작성, 제출하여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승인을 요청했다. 이에 따라 그는 서재필 등과 함께 뉴욕에서 대한민족대표단후원회를 조직하고 이원익과 함께 동방으로 파견되어 동포들로부터 특연금 219달러를 모집하여 대표단의 외교선전 경비에 충당했다. 1922년 대한민족대표단의 일원으로 중국 상해로 파견되었다. 천세헌은 4월 대한민국임시정부 임시의정원에 국민대표회 추진운동을 지원해 달라는 청원서를 제출하는 한편, 7월에는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임시의정원 국민대표회 주비회 등과 임시정부의 조직성격 문제를 놓고 대립하자, 안창호 등과 함께 시사책진회를 조직하여 각 단체들의 입장을 조정하고 임시정부를 창조적으로 발전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이후 다시 미국으로 귀환한 천세헌은 1923년부터 17년 동안 시카고에서 음식점을 경영하며 한인 동포들의 생활과 자치활동을 적극 후원하여 한인들의 은사라고 불리웠으며, 1933년 시카고에서 일본인 송강을 처단하여 한민족의 민족정신을 고취시키려고 계획했다. 1939년 10월 로스앤젤리스에서 최능익 등 조선민족혁명당 소장파들이 중국 한구에서 조직한 조선의용대를 후원할 목적으로 조선의용대 미주후원회를 조직하자, 1940년 7월 강영승과 함께 조선의용대 미주후원회 시카고지방의회를 설립하고 서기대표로 활동하면서 중국군대 후방공작을 협조했다. 1940년 시카고에서 다시 로스앤젤리스로 이주한 천세헌은 1942년 한국인의 대동단결과 미국 군사정보부와 접촉하여 미주 한인의 대일전 참전문제를 협의하기 바란다는 서재필의 서신을 받고 미국측과 미주 한인들의 대일참전 문제를 협의하기도 하였다. 또한 1942년과 43년에 걸쳐 각종 독립금과 기성금을 출연하여 조국의 독립전쟁을 적극 후원하는 등 35년동안 조국의 독립운동을 위해 헌신하다가 광복을 목전에 둔 1945년 6월 서거했다. 정부는 1995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시카고에서 찹수이 식당을 경영한 천세헌과 부인 박기영.
1923년 부터 17년간 경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