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해에서 국내 오가는 비밀요원으로 활동한 차(박)경신
성명 : 차(박)경신
훈격(연도) : 애국장(1993)
운동계열 : 만주방면
출생지 : 평안북도 선천
생존기간 : 1892 ~ 1978. 9.28
평안북도 선천 사람이다. 1919년 2월 일본 요코하마 여자신학교에 재학하고 있던 중 동경에서 2·8독립선언 후 국제정세의 변화를 독립운동의 절호의 기회로 삼고 2천만 한민족이 일치단결하여 독립운동을 결행하여야 한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일반 여자들을 일깨워 거족적인 독립운동을 일으켜야 한다는 큰 책임을 갖고 김마리아와 같이 비밀리에 입국하여 대구로 갔다. 이곳에서 김순애와 서병호를 만나 여성의 독립운동 참여를 위하여 부인회를 조직한 뒤 선천에서 신한청년당의 이름으로 50여명의 회원을 모집하고 3월 1일에 독립선언을 행했다. 차경신은 일경의 체포령이 있은 후 피난 겸 벽촌으로 밀행하여 독립전쟁의 준비로 간호대를 조직, 붕대 가위 약품 등을 마련한 후 의주에서 청년단을 조직하고 반년간 활동했다. 군무에 필요한 기구를 주선하여 단동으로 향하던 중 일경에게 피체되었다가 석방되었다. 1919년 11월에 대한청년단연합회 총무겸 재무로 피선되어 국내외를 다니면서 군자금을 모집했다. 12월에는 국내 여성독립운동 상황을 시찰, 격려하고자 출발하여삼도여자총회를 열어 결속을 다졌다. 이듬해 1920년 3월 1일에는 선천군에 소재한 보성여학교와 신성학교 학생들이 주도한 독립만세 시위운동에 참여했다. 차경신은 1920년 8월 하순, 보다 구체적으로 항일독립운동을 전개하기 위하여 상해임시정부로 건너가 도산 안창호를 도와 국내를 오가면서 비밀요원으로 활약했다. 1921년 1월에는 대한국민회 부인향촌회와 연계하여 군자금을 모금했다. 9월 정애경·최윤덕 등과 여자연합단의 대표로 임정에 자금을 지원했다. 10월 26일에는 평양부 김상만이 모금한 4백여원의 군자금을 임시정부에 전달했다. 조국독립운동을 뒷받침하는 자금조달에 일익을 담당하다가 1921년에는 몸이 극도로 쇠약해져 상해 홍십자병원에 입원했다. 1924년 1월 미국으로 건너온 차경신은 초대 애국부인회 회장과 대한인국민회 회원으로 독립운동을 계속했다. 로스앤젤리스 한국어학교를 설립하여 초대 교장으로 교포 자녀들의 교육에 진력했다. 1931년 로스앤젤리스 한국어학교 교장직을 사임하고 샌프란시스코에 있던 대한여자애국단 총본부가 로스앤젤리스로 옮기게 되자 1932년부터 1939년까지 여자애국단 총부단장에 재임하면서 각지에 지회를 조직하는 등 활동했다. 여자애국단에서는 임시정부, 독립신문사, 광복위로금, 구미위원부 군축선전비, 만주동포구제금 그 외에도 국내 수재의연금, 혹은 고아원 원조비 등 독립운동과 구제사업을 위해 힘썼다. 1924년 미국으로 건너온 뒤 조국광복의 날까지 독립운동을 위한 군자금 조달과 여성교육에 큰 몫을 담당했다. 1978년 9월 28일 로스앤젤리
스에서 별세했다. 정부는 1993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