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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김)미리사

대동교육회와 조선여자교육회를 조직한 차(김)미리사

차미리사성명 : 차(김)미리사 (車美理士)
훈격(연도) : 애족장(2002)
운동계열 : 대동교육회
출생지 : 서울
생존기간 : 1880. 8.21 ~ 1955. 6.1

서울 사람이다. 일찍이 기독교에 입교하여 선교사들을 통하여 서양 선진문화를 습득하고 여성의 사회활동에대해 관심을 갖게 되었다. 1905년부터 선교사의 도움으로 미국으로 유학을 온 뒤 대동교육회, 대동보국회 활동을 했다. 그는 유홍조, 이병준 등과 함께 대동교육회를 조직했다. 대동교육회는 국망을 예견하고 해외에 나와있는 한인들끼리 나라를 구하는 활동을 목적으로 조직한 교육기관이었다. 대동교육회는 패사데나에서 조직되었으며 장경이 회장을 맡은 단체였다. 그는 대동교육회 발기인으로 참여하였을 뿐만 아니라 대동교육회가 대동보국회로 발전할 때도 발기인으로 참여했다. 또한 대동신문의 발간에 크게 기여했다. 차미리사는 1917년 미국선교회에서 파견하는 선교사로귀국한 후 배화학교 교사와 사감으로 취임했다. 배화학교 사감으로 있으면서 “우리는 다 나가서 죽더라도 독립을 해야 한다. 죽는 것이 사는 것이다. 나라 없는 설움 당해 봤지. 나 한 목숨이 죽고 나라를 찾으면 대대손손이다 살게 아닌가!”를 역설하면서 학생들에게 민족의식을고취시켰다. 3·1 운동 이후에는 조선여자교육회를 조직했다. 조선여자교육회는 여성의 교육과 생활개선을 목적으로 1920년 1월에 조직한 것이었다. 그는 이때부터 배화학교 사감을 그만두고 예배당을 빌려 여자야학을 실시해 여성들의 문맹퇴치와 계몽에 헌신했다. 또한 근화학원 설립에 참여했으며,『여자시론』이란 잡지를 발행하는데 크게 기여했다. 전국순회강연회 등을 통해 민족의식을 고취하는데 심혈을 기울였다차미리사는 무궁화를 사랑해서 자신이 근무하는 학교교정에 무궁화를 심었을 뿐만 아니라 자수시간에도 무궁화를 수놓도록 했다. 광복후에는 여성 고등교육기관 설립을 추진해 1950년 덕성여자초급대학(현 덕성여자대학교)을 설립했다. 정부는 2002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