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를 섬기면서 독립금 모금에 나선 조성학
조성학은 1919년 3.1만세이후 북가주 오크랜드지역에서 독립기금 모금에 가장 열심을 보인 독립운동가였다. 신앙인으로, 청년교육가로, 그리고 민족운동가의 길을 책임있게 걸어왔다. 경제적 여유를 마련한 그는 독립운동의 후원자가 되는 것을 가장 보람으로 생각하며 살았다. 조성학은 1905년 5월18일 하와이 사탕수수 농장 노동자로 미국에 도착했다. 다시 샌프란시스코로 이주했고, 1907년 한인감리교회에서 청년활동 강연자로 활동을 시작했다. 그에게는 특별한 이야기가 있다. 1908년 27세의 나이에 미국 공립학교인 소살리트의 5학년에 다녔는데 인종차별로 퇴학을 당했다. 그는 변호사를 선임, 학교와 싸웠고 다시 학교로 돌아가서 차별을 이겨 낸 주인공으로 이름이 알려졌다. 조성학은 1910년부터 민족운동에 투신, 대한인국민회에서 애국동맹단을 결성했는데 회계를 맡았다. 의장은 최정익, 윤병구는 외교원, 황사용은 재무원, 이대위는 번역원으로 함께 일했다. 1913년 12월27일 치러진 북미지방회 총회 선거에서 이대위 목사가 회장에 당선되고 조성학은 부회장이 되었다. 1914년 5월 오크랜드로 이사를 했고 이발소를 시작했다. 그리고 1928년 대한인국민회 제18대 총회가 열렸을 때 총무로 선출되었다. 기독교 신앙을 바탕으로 하나님 나라를 소망하는 가운데, 나라의 독립을 위해 헌신하고 불의에 항거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보여준 인물이었다.처음에는 이발소를 차렸고 그후 식품점, 인삼장사로 경제적인 안정을 이루었다, 흥미로운 것은 조성학과 황사용 목사가 친인척관계라는 것이다. 황사용 목사와는 사촌 처남 매재간이고 임정구 목사와는 동서지간이다. 황사용 목사의 사촌 여동생중 맏이었던 인성은 조성학과 그 동생인 애성은 임정구 목사와 결혼을 했다. 조성학은 부인 조인성과 사이에 조 다니엘, 조 사무엘, 조 폴을 두었다. 1946년에는 오크랜드에서 중가주 리들리로 이주했고, 1961년5월30일 별세했다.
성명 : 조성학
훈격(연도) : 애족장(2014)
운동계열 : 미주방면
출생지 : 평안북도 박천
생존기간 : 1882. 4.13 ~ 1961. 5.30
1907년부터 샌프란시스코에서 공립협회 법무·학무원을 지냈다. 1910 ~ 1945년 대한인국민회 북미지방총회, 샌프란시스코 지방회, 오크랜드지방회 등에서 부회장, 재무, 학무원 등으로 활동했다. 여러 차례 독립운동자금을 지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