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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한경

영문 저술과 외교론으로 독립운동에 나선 정한경

정한경정한경은 높은 지식과 웅변술, 그리고 영문저술을 바탕으로 일제의 침략과 동남아의 세력균형 그리고 한국이 자주독립국임을 호소하기 위해 미국사회 깊숙히 파고들었던 미주 독립운동의 기수였다. 그는 이승만 박사를 가장 존경하는 인물이라고 말했다. 이승만 박사와의 관계는 1차대전부터 시작하여 2차대전 때까지 워싱턴에서 동거동락하며 외교를 통한 독립운동을 함께 벌였다. “ 이승만 박사는 고집이 센 분이고 타협하기 어렵고, 독재적인 성격도 없지 않아요. 그러나 그분은 의심없는 애국자이지요.”라고 표현했다. 정한경 박사는 언론과 출판등 글을 통해 독립운동에 이바지했다. 미국사회에서는 Henry Chung De Young으로 잘 알려져 있다. 1919년 5월 아시아잡지에 오늘의 한국이라는 주제로 기고했다. 1922년에는 한국의 사정이라는 책을 펴냈다. 1904년 14살의 나이로 새 세계에서 새 학문을 배우기 위해 미국땅을 밟았다. 1906년에는 네브라스카 커니로 옮겼다. 초중고등학교 과정을 모두 마치고 네브라스카 초급대학으로 진학했다. 그리고 네브라스카주립대학에서 학사와 석사를 받고 아메리칸유니버시티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이승만 박사이후 미국에서 2번째 박사가 탄생한 것이다. 1918년에는 시카고의 노스웨스턴대학 조교수가 되었고, 이때부터 본격적인 독립운동에 나섰다.1919년 파리평화회담에 참가할 대표 3명중의 한명으로 발탁되었다. 대표는 이승만, 김규식, 정한경이었다. 하지만 일본 대표들의 강력한 반발로 한국대표는 끝내 회의에 참석하지 못했다. 저자는 1983년 3월31일 록키산맥을 병풍처럼 두르고 있는 콜로라도 스프링스 교외 자택에서 정한경 박사를 인터뷰했다. “나는 마음으로는 도산 안창호 선생의 정신을 평생 따르면서 살았지만, 몸은 이승만 박사를 돕는 외교 일선에서 일을 했다.”고 말했다. 정한경 박사는 평생동안 국민회, 흥사단, 동지회에 가입하지 않고 독립적으로 일을 했다. 그의 독립론은 “한국은 약소국이므로 강대국인 미국을 움직여야만 대한의 독립이 가능하다”는 외교사상을 가지고 있었다. 미국인 조나 여사와의 사이에 큰 아들 에드윈 정, 헨리 정, 데이빗 정 그리고 딸 프란시스를 두고 있다. 1985년 95세의 나이로 별세했다.

성명 : 정한경 (Henry Chung De Young)
훈격(연도) : 독립장(1962)
운동계열 : 미주방면
출생지 : 평안남도 순천
생존기간 : 1890. 2.28 ~ 1985.6.30

평안남도 순천 사람이다. 국운이 기울기 시작하자 서재필에 이어 미국으로 건너 와 이승만, 민찬호 등과 한인동지회를 조직하여 활동하는 한편 네브라스카대학에서 수학했다. 1918년 11월 독일이 항복하여 세계 제1차대전이 끝나고 파리에서 만국평화회의가 개최되자, 태평양 연안 및 뉴욕 거주 교민들을 중심으로 김규식과 함께 신고려회를 조직하여 평화회의에서 한국의 입장을 피력할 수 있도록 계획했다. 이에 따라 미주 각지에서 모인 재미한인전체회의가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 주최로 개최되고 이 대표회의 결의에 따라 만국평화회의에 파견할 대표로 이승만, 민찬호와 함께 그를 선출했다. 이에 따라 12월 프랑스행 여권을 발급 받고자 했으나 일본총영사관의 방해로 결국 프랑스행은 좌절되고 말았다. 이에 정한경은 1919년 2월 25일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 임시위원회 대표 명의로 이승만과 함께 윌슨 대통령과 강화회의 각국 대표들에게 청원서를 제출했는데, 주요 내용은 아래와 같다. 첫째 열강은 한국을 일본의 학정으로부터 구출하라. 둘째 열강은 장래 한국의 독립을 보장하라. 셋째 한국은 당분간 국제연맹의 통치 아래두자. 이것이 소위 위임통치안으로서, 뒤에 말썽이 되어 이승만은 내외의 공격을 받았으며 임시정부의 대통령직도 탄핵 면직되었다. 그는 또한 기독교 인사와 세계 약소국 동맹회를 배경으로 미국 정치가들을 방문하고 미국 국회에서 한국의 독립을 정부에 요망하게 하는 한편 신문지상에 성명서를 발표하여 미국민의 성원을 요청하였다. 이와 아울러 그는 “북미합중국의 동양정책(The Oriental Policy of the United States)”과 “평화회의(The Peace Conference)” 등의 글을 저술하여 한국 독립의 불가피성을 역설했다.그리고 1919년 4월 14일부터 3일간 대한인국민회 간부들을 중심으로 필라델피아 독립기념관에서 대한독립선언식을 성대하게 거행하는 한편 독립운동자금을 갹출하여 상해 임시정부를 원조하기도 했다. 1921년에 정한경은 대한민국임시정부 구미위원부 위원에 임명되었다. 5월에는 현순이 임시정부에서 파견되어 구미위원부 위원장 겸 주미대사로 발령되어 외교와 재정을 담당하고, 그에게 선전을 전담하도록 하였는데 현순은 교포 사회의 환영을 받지 못하고 알력이 일어나 결국 축출되었다. 10월 그는 호놀룰루 교민들의 초청을 받고, 이승만을 대신하여 “태평양회의 한국대표”의 자격으로 참석, 한국의 독립운동과 민족정신에 대하여 연설함으로써 열렬한 호응을 받기도 하였다. 그는 또한 “한국사정”을 영문으로 발행하여 한국의 역사, 지지(地誌) 및 정치관계와 일제의 교회 탄압 등 침략야욕을 지적함으로써 크게 호평을 받았다. 이후 정한경은 임시정부의 워싱톤위원부 위원으로 독립운동을 계속했다. 1944년 5월에는 임시정부에서 그와 임병직을 전후구제회의, 태평양학회 등 국제회의에 대표로 파견했다. 10월 20일에는 임시정부 국무회의에서 구미위원부를 주미외무위원회로 개편하여 위원장에 이승만을 임명했다. 그는 위원 겸 비서주임으로 임명되었고 김원용, 한시대, 김호 등과 함께 주로 대미외교 업무를 전담했다. 정부는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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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라델피아 독립기념관 내 미국 초대 대통령 조지 워싱턴이 사용했던 의자에 앉아 있는 이승만 박사와 태극기를 들고 서있는 정한경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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콜로라도 스프링스를 방문, 정한경 박사를 인터뷰 (1983년 3월3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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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 국립묘지의 정한경 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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