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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양필

정안회사로 사업 성공후 독립기금 지원한 정양필

정양필정양필은 7살때인 1905년 박용만을 보호자로 미국에 도착했다. 정양필의 아버지 정순만은 박용만과 의형제를 맺은 사이였다. 그당시 이승만, 박용만, 정순만을 삼만이라고 불렀다. 의형제를 맺을 정도로 서로 가까웠다. 정양필은 갖은 어려움을 이겨내고 1918년 네브라스카대학 공과대학을 졸업했다. 1919년에는 디트로이트에서 서울식당이라는 양찬관을 열었다. 1921년에는 다시 라초이 회사에서 일했다. 그리고 조오흥을 불러드렸고, 숙주나물 재배와 곡물과 야채 저장을 관할할 적임자로는 안재창을 추천했다. 훗날 세사람이 동업으로 회사를 설립하게 된 만남이었다. 정양필과 안재창, 조오흥은 1922년 찹수이 도매업인 정안회사를 세웠다. 그리고 1925년에는 미시간주에 등록한 주식회사로 바꾸고 이후 사업은 크게 성장을 했다. “아버지 정양필과 어머니 이화숙은 서로 고국에서 부터아는 사이로 결혼을 하게 되었다고 들었어요. 서신을 통해서 사위게 된 사진결혼이지요. 아버지와 어머니는 앤아버에서 1920년 결혼식을 올렸습니다.” 둘째 딸 로사리는 “아버지는 정안회사의 경영에만 전념했다.”면서 들려준 부모들 이야기이다. 정양필은 아버지 뜻에 따라어린 나이에 미국에 왔고, 디트로이트에서 사업을 벌여성공했다. 그리고 구국운동에 재정적으로 지원을 했다. 정양필은 81세인 1974년에 그리고 독립유공자로 훗날 선정된 부인 이화숙은 86세인 1978년 각각 세상을 떠났다. 부부 독립유공자이다.

성명 : 정양필
훈격(연도) : 애족장(1995)
운동계열 : 미주방면
출생지 : 충청북도 청원
생존기간 : 1893.12. 1 ~ 1974

충청북도 청원 사람이다. 정순만의 아들로 1905년 2월박용만, 유일한, 정한경 등과 함께 미국으로 이민왔다. 도미 후 1906년 박용만의 숙부 박장현을 비롯하여 유일한, 정한경 등과 함께 네브라스카주 커니시에 취역하여 커니중학교를 졸업했다. 1909년 6월 박용만이 미국내 최초의 한인군사학교인 한인소년병학교를 설립하자, 이에 입교하여 야구팀 및 육상팀 군사훈련부 등에서 활동하며 장차 독립전쟁 발발시 항일투쟁에 필요한 사관생도로서 전투훈련 수업을 받았다. 한인소년병학교 졸업 후 1913년 네브라스카주립대학에 입학, 농학특업사 학위를 취득했다. 1919년 4월 13일 대표들이 서울에서 비밀회의를 갖고 국민대표 25명과 함께 한성임시정부 위원을 발표할 때 평정관으로 선임되었다. 1942년 12월 북미 대한인국민회 디트로이트 지방 총회 회원으로 활동했다. 1942년 1월부터 6월까지 수차에 걸쳐 군자금을 제공하는 등 일생을 조국의 국권회복 운동을 위해 헌신했다. 정부는 1995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네브라스카 헤이스팅스 소년병학교(Young Korean Military School)의 릴레이 경주 팀. 오른쪽 첫째가 정양필.

네브라스카 헤이스팅스 소년병학교(Young Korean Military School)의 릴레이 경주 팀. 오른쪽 첫째가 정양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