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미한족연합위원회 워싱턴 외교원으로 활동한 정두옥
성명 : 정두옥
훈격(연도) : 애국장(1995)
운동계열 : 미주방면
출생지 : 미상
생존기간 : 1889.11.21. ~ 1972.9.9.
1903년 하와이로 노동이민을 온 후 일찍부터 하와이 한인사회에서 지도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1914년 대한인국민회 하와이 지방총회 와이엘누아지방 대의원으로 활동하는 한편, 6월 하와이 지방총회 연무부 사업의 일환으로 박용만이 대조선국민군단을 창립하자, 적극 후원했다. 1918년 7월 박용만이 하와이 한인사회 통합을 목적으로 조직한 갈리히연합회에 발기인으로 참석하여 박용만의 정치노선을 지지했다. 1919년 3월 박용만이 국내와 원동의 항일독립운동단체를 통합할 목적으로 결성한 대조선독립단 총단장으로 활동했다. 같은 해 5월 박용만이 중국 북경으로 가 원동의 군사단체들과 연락하여 1921년 4월 군사통일주비회를 개최하자, 10월 하와이 대조선국민대표기성회 위원으로 최고의 독립운동기관을 설립하자는 선언서를 발표하여 군사통일회의 운동노선과 자금 후원을 적극 조달지원했다. 1931년 9월 만주사변이 발발하자, 하와이 대한인국민회내에 공동회를 소집하여 일제의 침략정책을 규탄하고 국권회복운동을 촉진하는 선전사업의 필요성을 역설하여 공동회 내에 선전부를 조직하고 선전부장으로 선임되어 항일무장투쟁을 적극 주장했다. 또한 기관지인 「국민보」의 주필로 활동하면서 동포의 문맹퇴치와 자녀들의 교육 장려, 조국의 독립운동 선전등에 힘썼다. 1939년 로스앤젤리스에서 김창순, 이창의 등의 발기로 국제문화운동의 일환으로 한미문화협회가 발족되고 이어 워싱턴에 문화회관 건립이 추진되자 문화회관 건설위원장으로 활약했다. 이와 동시에 1940년 5월 중국 관내에서 결성된 한국독립당을 후원할 목적으로 하와이 오아후지방에서 한국독립당 하와이지부를 조직하고 집행위원장으로 선임되어 원동의 특무공작과 한국 광복군 편성의 경제적 후원을 담당했다. 1939년 중국의 한인독립운동단체인 광복진선과 민족전선이 하나로 통합되고 중일간 전쟁이 고조되자, 이에 영향을 받은 북미 대한인국민회는 1940년 9월 미주와 하와이 각 단체 대표자들이 연석회의를 개최하여 시국대책을 강구할 것을 하와이 대한인국민회와 동지회에 제의했다. 이에 따라 1941년 4월 20일 하와이 호놀룰루에서 미국내 각 한인단체 대표들이 모여 해외한족대회를 개최했다. 8월 미주내 모든 단체들을 통합한 재미한족연합위원회가 조직되고 하와이 호놀룰루에 재미한족연합위원회 의사부를 설치하자, 의사부 위원 및 선전부 위원장으로 선임되어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후원과 외교 및 선전사업을 추진하였다. 또한 이 시기 하와이 지역 중국사람들과 연대하여 중한민중동맹단을 결성하고 단장에 취임하여 중국과 연대한 항일투쟁 전개에 박차를 가했다. 재미한족연합위원회 외교사무소를 워싱턴에 개설하고 그를 외교원으로 선임하자 이에 부임하여 외교사무를 전개했으며, 제2차 세계대전 당시에는 미군을 돕기 위해 정보수집 임무 등을 자진 수행하기도 했다. 1945년 조국이 광복되어 10월 조국의 재건 후원을 목적으로 재미한족 국내파견대표단이 구성되자, 하와이 한국독립당 총지부 집행위원장 자격으로 대표단의 일원으로 선임되어 1946년 1월 하와이를 출발하여 2월 고국에 도착했다. 고국에 도착 후 김구 등과 접촉하고 중도노선을 추구하며 온건 좌우파의 합작운동에 주력하였으나 당시 해방정국의 혼란으로 인해 별다른 활동을 보이지 못하고 8개월 만에 미국으로 돌아왔다. 그 뒤 1969년 『재미한족독립운동실기』란 저서를 발간하여 미주 한인들의 독립운동사 연구에 공헌을 했다. 정부는 1995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