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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명운

친일 외교관 처단에 나선 의열투쟁의 주역 전명운

전명운전명운은 샌프란시스코에서 친일외교관 듀함 스티븐스 저격에 장인환과 함께 나선 주역이다. 1908년 3월23일의 이 애국사건은 구한말 항일 국권회복운동으로서 의열투쟁에 효시를 이루었다. 듀함 스티븐스를 겨누었던 전명운의 첫 총탄은 불발되었지만 뒤를 이어 발사된 장인환의 세발 총탄에 의해 처단되었다. 전명운은 1905년 9월 하와이에서 샌브란시스코에 도착, 고학을 하면서 공립협회 회원으로 활동했다. 천성이 영민강맹하였던 전명운은 애국애족의 열성이 대단한 청년이었다. 신학문을 배우고 개화와 계몽에 나서기 위해서 사탕수수 농장에 노동자로 왔고, 미국에서 독립운동에 불을 붙인 애국지사 1호가 되었다. 1908년 6월 일시 석방된 전명운은 일제의 감시와 암살협의 등의 압박감으로 이름마져 맥 필드(Mack Fields)로 바꾸었다. 장인환 의사 재판에 줄 영향과 또한 일제의 재구속에 대한 우려로 샌프란시스코를 떠나 연해주 블라디보스톡으로 건너갔다. 전명운은 1908년 12월 안중근이 블라디보스톡 동의회 지회에 가입함으로서 자연히 둘이 만나게 되었다. 안중근과는 같은 집에 머물기도 했으므로 이등박문 처단 의거에 두 사람이 긴밀히 의견 교환을 나누었을 것으로 예상된다. 일제당국은 이등박문의 처단의거를 즉각 「제2의 스티븐스 사살사건」이라고 단정했다. 스티븐스를 사살에 가담한 전명운이 연해주 블라디도스톡에 1년간 체류한 일이 있기에 범인들은 전명운이라고 추측하는 보도까지 내보냈다. 전명운은 로스앤젤리스 대한인국민회 회원으로서 그리고 57세의 노령에도 한인국방경위대(맹호군)에 자원 입대하는 등 미국에서 40년을 조국독립운동에 나섰다. 전명운은 1945년 8월15일 조국광복의 기쁨을 맛보았고 1947년 11월18일 63세를 일기로 별세했다. LA천주교 묘지에 묻혀 있다가 1994년 4월서울 동작동 국립묘지 애국지사 묘역으로 이장되었다. 맏딸 로즈메리(경숙)과 차녀 마가렛(경용)을 두었다. 로즈메리는 유학생인 이태모와 1942년 결혼했고 맏사위는 OSS 참가로 독립유공자가 되었다. 장인과 맏사위가 나란히 독립유공자가 된 것이다.

성명 : 전명운
훈격(연도) : 대통령장(1962)
운동계열 : 스티븐스 주살
출생지 : 서울
생존기간 : 1884. 6.25 ~ 1947.11.18

서울 사람이다. 서울 한성학원에서 수학하던 그는 1905년 5월 노동이민으로 하와이로 왔다. 이어 1906년 6월 도미하여 철도노동자, 알라스카 어장노동자로 일하면서 미주 독립운동 단체인 공립협회의 회원이 되어 주로 청년회에서 활약했다. 1908년 3월 당시 대한제국 외교고문 미국인 스티븐스가 도착후 기자회견에서, 일본제국주의의 한국통치를 잘된 일이며, 일제의 통치만이 한국을 발전시킨다는 간악한 거짓 내용의 망언을 서슴지 않았다. 미국내의 독립운동단체인 공립협회와 대동보국회 회원들은 크게 분노하여 먼저 대표자를 선출하여 스티븐스에게 보내 그의 망언을 취소하도록 요구키로 했다. 그러나 이들 대표의 요구가 묵살되자 공립협회와 대동보국회에서는 스티븐스 처단방법을 논의했으며, 이때 그가 자원했다. 그리하여 전명운은 이튿날인 1908년 3월 23일 오전 9시30분경 스티븐스가 워싱턴으로 가기 위해 샌프란시스코 주재 일본영사 소지의 안내를 받으며 페리선창에 도착하자 권총을 발사했으나 탄환이 발사되지 않자 권총을 든 채로 스티븐스에게 돌진하여 권총으로 가격하면서 발악을 하는 스티븐스와 격투를 벌였다. 이때 장인환이 총탄 세발을 발사하여 두발은 스티븐스의 가슴과 다리에, 나머지 한발은 그의 어깨에 맞았다. 그와 중상을 입은 스티븐스는 미국 경찰에 의해 병원으로 급히 옮겨졌으며 장인환은 바로 구속되었다. 그는 병원에서 스티븐스를 습격한 이유를 묻는 미국 경찰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일본이 러시아와 싸우기 시작하면서 한국의 독립을 확실히 한다고 선언했는데 지금 와서는 우리 국권을 빼앗고, 우리 재정을 흡수하고, 우리 관직을 차지하며, 헌병 순사가 전국에 가득찼다. 그러므로 내가 미국에 와서 학업을 닦아 국가에 헌신하려던 것인데 지금 스티븐스가 각처에 통신하여 말하기를 ‘한국인이 일본인을 환영하고 일본인에게 감복한다’고 하니 이것은 속이고 업신여기기도 심한 것이다. 그러므로 내가 이 도적을 죽이려 한 것이다” 그의 이와같은 거사 동기는 각 신문에 보도되어 미국 내의 동포들은 물론이고 미국인들까지 그의 애국심에 감탄했다. 그는 병원에서 퇴원한 후 미국 경찰에 수감되어 심문을 받다가 같은 해 6월 교포들의 주선으로 보석 석방되었다. 그후 그는 9월 러시아 연해주로 건너가 그곳 독립운동단체인 동의회에 가입하여 활약하다가, 다시 샌프란시스코로 돌아와서 의용군을 조직, 군자금을 모집하여 상해임시정부에 보내기도 했다. 정부는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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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명운 의사와 둘째딸 마가렛(왼쪽) 그리고 맏딸 로즈메리. LA차이나타운에 있는 식당을 자주 찾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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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명운 의사와 세 자녀들. 왼쪽부터 둘째딸 마가렛(경용), 막내아들 알프렛, 맏딸 로즈메리(경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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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성한인연합장로교회에서 전명운 의사의 서울 동작동 국립묘지 이장식이 거행되었다. (1994년 4월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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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동작동 국립묘지로 이장된 전명운 의사 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