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주 독립운동의 횃불을 높이 올린 애국지사 1호 장인환
장인환 의사는 한말 나라가 쓰러져가는 비통함에 분연히 일어나 일본 앞장이 외교고문을 쏘아 죽이고 젊음을 옥중에서 불사른 미주내 애국지사 1호이다. 샌프란시스코 페리항에서 대한제국이 자주 독립국가임을 만방에 알리는 세발의 총성이 울린 것은 1908년 3월23일. 장인환 의사는 친일외교관 듀함 스티븐스가 워싱턴DC로 가기 위해 페리정거장에 나왔을 때 그를 향해서 방아쇄를 당겼다. 미주에서의 첫 의열독립투쟁은 다음해 안중근 의사의 이등박문 저격, 이재명 의사의 이완용 습격 그리고 윤봉길과 이봉창 의사의 대한독립을 위한 거사로 이어진다. 친일 외교관 듀함 스티븐스는 1908년 3월21일 샌프란시스코에서 “일본의 한국 통치는 한국국민 모두가 바라는 것이다.”라는 망언을 했고 신문에 보도가 되었다. 공립협회와 대동보국회에 가입한 한인대표들은 호텔로 찾아가 정정을 요구했으나 이를 거부하자 끝내 저격을 한 것이다. 장인환 의사가 한국이나 중국에서 스티븐스를 저격했다면 현장의 이슬로 사라졌을 것이다. 그러나 사형을 면하고 25년형을 받은 것은 두가지 이유 때문이다. 첫째 탁월한 미국 변호사를 선임했기 때문이다. 또한 변호비가 충분히 모금되었다. 다음은 미국 형법내 불완전한 정신상태 (Insane) 에서 저지른 행위는 형을 면제받거나 적게받을 수 있다는 진보적이 조항이 있기 때문이다. 7천여 미주의 초기이민자와 멕시코 농장의 1천여 한인 이민자가 장인환 의사의 애국재판 변호비용을 자진해서 냈다. 8,390 달러의 변호비가 일시에 모아진 것은 처음있는 역사적인 일이였다.샌프란시스코 한인교회 교인들은 1919년 1월10일을 가장 자랑스런 날로 기억한다. 바로 장인환 의사가 가석방으로 풀려났고 이대위 목사와 교인들이 축하잔치를 베푼 날이기 때문이다. 장인환 의사는 “대한인국민회의 주선과 황사선 목사의 보증으로 이렇게 나오게 되었습니다. 여러분은 합심해서 나라를 찾는 일에 나서주기를 바랍니다.”라고 감사의 인사말을 전했다. 그리고 완전히석방된 1924년 4월13일 샌프란시스코 한인사회 모두는 장인환 의사 해방 축하회를 공식으로 개최했다. 1930년 5월22일 병석에 있던 그는 스스로 삶을 마감했다. 장인환 의사의 장례식은 한인사회장으로 치루어졌다. 장례식후 샌프란시스코 사이프러스 공원묘지에 안장되었다가 1975년 서울 동작동 국립묘지로 이장되었다.
성명 : 장인환
훈격(연도) : 대통령장(1962)
운동계열 : 스티븐스 주살
출생지 : 평안남도 평양
생존기간 : 1876. 3. 10 ~ 1930. 5. 22
평안남도 평양 사람이다. 1905년 2월 노동이민으로 하와이에 와서 다시 1906년 8월 도미하여 샌프란시스코에서 조직된 미주 한인의 독립운동단체인 대동보국회 회원이 되었다. 주로 철도 노동자와 알라스카 어장에서 노동 등을 하면서 독립운동을 모색했다. 1908년 3월 당시 대한제국 외교고문으로 있던 듀함 스티븐스(D.W.Stevens)가 일제의 대한제국 외교권 강탈로 인해 국제여론이 악화되자, 일제의 지령으로 자신의 본국인 미국에서 대한제국의 무능력을 적극 홍보하고 일제의 침략행위를 정당화하는 선전활동을 펴고자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했다.스티븐스는 3월 21일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하여 신문기자들에게 을사늑약을 비호하고 한국을 비판하는 내용의 발언을 하였다. 이와 같은 내용의 연설이 미국의 각 신문에 발표되자 샌프란시스코와 그 인근 지역에 거주하던 미주 한인의 독립운동단체인 공립회관에 모여 대책을 토의했다. 우선 최유섭, 정재관, 문양목, 이학현 등을 스티븐스에게 보내어 신문에 보도된 내용에 대해 힐문하고 그 취소를 요구하기로 했다.그러나, 동포 대표들을 만난 스티븐스는 방자하고 무례한 태도로 매국노 이완용을 충신이라 하고, 침략의 괴수인 이등박문의 있음이 한국과 동양의 행복이라 하고 한국의 인민은 우매하여 독립할 자격이 없다고 하는 등 폭언과 궤변을 서슴치 않았다. 이러한 스티븐스의 오만하고 안하무인적인 언행은 동포 대표들을 격분시켰다. 참다 못한 정재관이 스티븐스의 턱을 강타하자 다른 대표들도 의자들을 들어 스티븐스를 난타했다. 동포들의 울분은 호텔의 다른 사람들의 제지로 더 이상 발산되지 않았지만 회관으로 돌아온 대표들로부터 자초지종을 전해들은 많은 동포들은 일본제국주의 침략행위를 찬양하며 왜곡하는 스티븐스의 행동에 치를 떨며 그 처단방법을 논의했다. 하지만 이날은 토의만 있었고 어떠한 결론을 맺지는 못했다. 한편, 장인환은 스티븐스의 망언과 침략행위에 대해서 단호한 응징을 하고자 결심했다. 이미 일제의 주구가 되어 거짓된 선전과 조국실상에 대한 왜곡을 일삼는 스티븐스에 대해 그 어떠한 성토와 반박만으로 그를 공격한다는 것은 전혀 실효를 거둘 수 없다고 생각했다. 장인환은 스티븐스의 죄악을 징치(懲治)하고 한국민의 자주독립 정신을 세계만방에 떨치고자 결심했다. 1908년 3월 23일 아침 스티븐스가 워싱톤으로 출발하고자 샌프란시스코 페리선창에 일본영사 소지와 함께 도착하여 그가 스티븐스를 향해 총을 겨냥하려 할 때 돌연히 한 남자가 나타나 스티븐스를 향해 권총을 쥔 채로 돌진하여 놀란 왜적의 주구와 격투가 벌어졌다. 그 남자는 전명운으로 장인환과 마찬가지로 침략 원흉인 스티븐스를 처단하기 위해 기다리던 중, 스티븐스가 나타나자 권총을 발사했으나 불행히도 불발이 되자 그에게 달려들었던 것이다. 하지만 장인환은 기회를 놓칠 수가 없었다. 그는 스티븐스를 향하여 권총을 세 발 발사했다. 연속 세발의 탄환 중, 두발이 스티븐스의 가슴과 다리에 명중하였고, 한발은 전명운의 어깨에 맞았다. 전명운과 스티븐스는 총성을 듣고 출동한 경찰에 의하여 병원으로 이송되었고, 의거를 성공시킨 그는 곧 구속되었다.청년 장인환은 심문하는 미국 법관에게 “스티븐스가 보호조약을 찬성하니 이것은 이천만 동포를 독살하려는자이다. 이 도적을 죽이지 않으면 우리 동포가 반드시 멸망하게 되겠으므로 내가 신명을 내놓고 이 일을 한 것이다”라고 당당하고 의연하게 거사 이유를 밝혔다. 이러한 그의 애국정신은 많은 동포들의 애국심을 고취시켰으며 심지어는 미국사람들마저 그의 거사에 대해 찬탄을 일으키게 하였다. 한편 그의 정의로운 총탄세례를 받은 스티븐스는 3월 25일 병원에서 사망했다. 장·전 두 의사는 1908년 12월 미국 법정에서 판결을 받았는데, 장인환은 종신형에서 징역 25년형을 언도받고 옥고를 치렀다. 그는 1919년 1월 10일 가석방되었고, 이어 1924년 4월 10일에는 완전 자유의 몸이 되었다. 1927년 4월 20일 잠시 귀국하였으나 일본 제국주의자들의 감시와 옥고로 인한 신병 때문에 그해 10월 11일 다시 샌프란시스코에 돌아가 생활하던 중, 1930년 4월 24일 자살했다. 정부는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