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인국민회 통해 독립운동에 헌신한 임정구 목사
임정구는 공립협회와 대한인국민회를 통해 평생토록 독립운동을 전개한 안창호 계열의 중견 민족운동가였다.평양에서 태어났다. 평양에서 닥터 노블 선교사에게서 침례를 받고 서양문물에 눈을 떴다. 배움에 대한 열정으로 1905년 어머니와 함께 하와이에 도착, 1년간 어학 공부를 했다. LA에서 초등학교와 중학교를 마쳤고, 클레아몬트학생양성소에서 공부를 했다. 그리고 포모나대학을 졸업했다. 1917년에는 다시 버클리에 입학, 경제학부를 마쳤다. 산 안젤모에 있는 샌프란시스코 신학교에 1918년 공부를 했다. 임정구 목사는 황사용 목사의 뒤를 이어 1915년 6월25일 오클랜드교회 지방전도사로 임명되었다. 이후 목사안수를 받고 18년동안 사역을 담당했다. 황사선 황사용 목사의 사촌 여동생 황애성씨와 결혼했다. 임정구는 독립운동 현장에 항상 함께 있었다. 1915년 부터 1939년까지 오크랜드와 새크라멘토, 멘티카, 스탁톤, 리들리에서 전도사와 목사로 목회하면서 한인들의 신앙을 독실하게 하고, 한인들을 위안하고, 교육하고, 권익을 옹호했다. 그리고 일제 강점기 대한인국민회 북미지방총회 부회장, 총회장 대리, 중앙집행위원, 대의원회 의장, 오크랜드지방회 대의원 등으로 활동했다. 항일의식고취, 독립운동 자금 모집, 대한민국임시정부 지원, 중국인과의 항일공동 결성 등 국권회복을 위해 진력했다. 스티븐스 저격의 주역인 장인환 의사가 25년형을 받고 샌 퀸틴에서 11년만에 황사선 목사의 보증으로 1919년 1월10일 가출옥을 했다. 이날 오후 샌프란시스코 한인교회에서 장 의사 환영회를 열었다. 임정구 목사가 개회를 선언하고 행사 취지를 설명했다. 임정구 목사는 1919년 대한인국민회 북미지방총회 의회 의장으로 선임되면서 민족지도자로서의 길을 걸었다. 이대위 목사가 북미지방총회 회장을 사임한 후 회장직 대리로 지방회를 곳곳에 세웠고, 1930년 광주학생운동 후원회를 조직했다. 임정구는 대한인국민회 체재가 회장제에서 위원제로 변경된 1937년 1월3일 북미지방총회 중앙집행위원 겸 구제담당 상무집행위원에 선임되었다. 1939년 12월28일 52세의 젊은 나이에 별세, 오크랜드 마운틴 뷰 공원묘지에 안장되었다. 장남 모세 임과 차남 헨리 임의 두아들을 두었다. 모세 임의 아들인 손자 하워드 임이 할아버지를 뒤를 따라 목회자가 되었다.
성명 : 임정구 (Chung Koo Yim)
훈격(연도) : 애국장(2013)
운동계열 : 미주방면
출생지 : 평안남도 평양
생존기간 : 1887.10.25 ~ 1939.12.28
1905년 샌프란시스코에서 안창호가 조직한 공립협회에 가입하여 1906년 11월 로스앤젤리스 지방회 경찰로 선임되었다. 1907년 4월 임준기, 정원도와 함께 학생회를 조직했다. 1908년 8월 클레아몬트학생양성소 설립 발기인으로 참여했다. 그리고 10월 학생으로 입학했다. 1909년 공립협회가 국민회 북미지방총회로 재편된 후에도 클레아몬트학생양성소 재무로 활동했고, 1910년 4월에는 업랜드 지방회를 조직하고 평의원으로 선임되었다. 1911년 업랜드지방회 대의원, 1912년 클레아몬트지방회 평의원, 학무원, 1916년 리버사이드지방회 대의원, 북미지방총회 실업부원을 지냈다. 1917년 샌프란시스코지방회 대의원, 북미지방총회 학무원, 1918년 샌프란시스코 지방회 회장, 총무, 북미지방총회 부회장, 학무원, 버클리학생양성소 설립위원으로 활동했다. 1919년 북미지방총회 부회장 겸 총회장 대리, 1920~1928년 샌프란시스코지방회 대의원, 1931~1933년 미주한인연합회 선전부장, 1934년과 1936년 대한인국민회 부회장, 1937~1938년 대한인국민회 중앙집행위원으로 활동했다. 1907년부터 1939년까지 지속적으로 국민의무금, 독립의연금 등을 지원했다. 정부는 2013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임정구 목사와 부인 황애성과 자녀들 (Roberta Chang Collection)

임정구 목사가 순행전도로 스탁톤교회를 방문했다. 넷째줄 오른쪽에서 세번째가 임정구 목사. (1920년대)

버클리 졸업 때의 임정구 목사.

오크랜드에 있는 임정구 목사 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