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시정부와 미 공군으로 독립 위해 싸운 이충천
성명 : 이충천 (Moses Lee)
훈격(연도) : 애족장(2003)
운동계열 : 국외
출생지 : 미국 하와이
생존기간 : 1912. 4.11 ~ 1997. 5. 3
하와이 사람이다. 유타대학에서 공부하던 중 부친 이학주의 뜻에 따라, 1933년 5월 중국 상해로 도항하여 대한민국임시정부 김구와 이시영으로부터 우리말 국사, 민족문화사, 중국어를 교수받았다. 이범석과 이청천에게서 독립운동방략을 학습받았다. 이때 김구는 조종사 자격을 갖고 있는 이모세에게 “하늘을 찌르라”는 뜻으로 이충천이란 이름을 지어 주었다 한다. 1934년 2월부터 중국 남경에서 한인들의 낙양군관학교 입학을 권유하는 한편, 남경 거주 일본간첩과 잠복관헌들의 색출을 위해 중국경찰과 협동작전을 전개했다. 1935년 4월부터는 낙양군관학교에서 훈련을 마치고 박시창과 함께 대위로 임관되어 낙양군관학교 교관으로 한국학생들의 군사훈련을 실시했다. 1936년 12월부터는 김구의 명령으로 남경에서 엄항섭과 함께 한국국민당과 관계하며 영어 및 중국어판 신문기자로 활약하며 독립운동에 관한 기사내용을 게재했다. 항일투쟁과 독립쟁취에 관한 출판물을 영어와 중국어로 번역 · 출간하여 세계각국에 배포했다. 또한 한민
3호에 무장을 준비하자라는 글을 기고하여 한인들이 대한민국임시정부와 한국국민당을 중심으로 단결할 것을 촉구하기도 했다. 1937년과 38년에 걸쳐 한국국민당 청년단 선전원으로 대외선전업무에 종사하던 중 말라리아에 걸려 건강이 악화되자, 1938년 4월 하와이로 돌아왔다. 그후 태평양전쟁이 일어나자, 1944년 미국 공군에 지원 입대하여 미군 제7 공군에 배속되어 활동하다가 해방후 퇴역했다. 1950년 6·25전쟁이 일어나자 출전하여 극동군총사령부 정보국에서 활동하며 포로송환등의 활동에 기여했다. 정부는 2003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