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해 임시정부 집행위원 거쳐 미국에서 독립운동 이(정)화숙
이화숙은 이화학당을 졸업했다. 3.1만세운동이 일어날 때까지 이화에서 교편을 잡고 있었다. 3.1만세후 그는 조선독립운동을 위해 한성정부 발기인 30명에 참여했다. 상해로 망명하여 임시정부에서 활동했다. 조선적십자사 설립위원으로 이사가 되어 임시정부의 집행위원까지 올랐다. 조선여성단을 만들어 임시정부를 돕고, 상해에 도착하는 조선인의 정착을 위한 일을 맡았다. 동료의 소개로 네브라스카대학을 나와 미시건주 디트로이트에서 사업을 하는 정양필의 사진신부로 결혼하기위해 1920년 9월 도착했다. 남편 정양필은 안재창, 조오흥의 사업 파트너로 중국음식 찹수이 제조와 도매하는 회사를 경영하고 있었다. 정안도매회사는 1920년대 미국에서 가장 성공한 기업이 되었다. 2차대전중 이화숙은 디트로이트에서 조국의 독립을 돕기 위해 한인여성클럽을 조직했다. 무엇보다도 자녀교육을 가장 중시했다. 장녀 로잘리는 정신과 의사, 차녀 플로랜스는 환경장관 참모, 삼녀 도로시는 고등학교 교사,사녀 아이린은 약리학사가 되었다.
성명 : 이(정)화숙
훈격(연도) : 애족장(1995)
운동계열 : 임시정부
출생지 : 서울
생존기간 : 1893년 ~ 1978년
서울 사람이다. 1919년 한성 임시정부 성립때 작성된 공약 삼장의 대한민족대표 30명 중 한 사람으로 참가 한뒤, 중국 상해로 망명했다. 1919년 7월 상해의 장빈로 애인리에서 조직된 임시정부 후원단체인 대한적십자회 상의원으로 선출되었으며, 9월에는 임시정부 국무원 참사로 임명되어 활동했다. 또한 같은 해 10월에는 상해 불란서 조계 보창로에서 임시정부 후원을 목적으로 애국부인회를 조직하여 회장으로 재직하면서 임시정부 재정지원과 동포 구원활동을 펼쳤다. 1920년 임시정부의 외곽후원단체인 민단의 상의원으로 활동하다가 미국으로 도항했다. 미국에서 정순만의 아들인 정양필과 결혼하여 생활하면서 지속적으로 독립운동자금을 출연하는 등 광복이 될 때까지 조국독립을 위한 후원활동에 전력했다. 정부는 1995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