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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원순

이승만 독립운동을 후원하며 사업에 성공한 이원순

이원순이원순은 젊은 나이에 하와이로 정치적 망명의 길을 택했다. 처음 박용만의 비서로 독립운동에 나섰다. 박용만이 1928년 중국에서 피살된 후 이승만의 청을 받아 동지회에 가입을 했다. 구미위원부 위원 등 15년동안 이승만박사의 외교를 통한 독립운동을 후원했다. 미국에서 부동산 사업으로 성공한 첫 백만장자이다. 1890년 개화바람이 한창일 때 서울에서 태어났다. 관립외국어학교와 보성전문학교를 졸업했다. 1914년 가을, 24세 나이에 하와이에 도착했다. 대한독립단 박용만 단장의 비서로 첫 일을 하게 되었다. 생업으로 노동보다는 처음부터 장사길을 선택했다. 자동차 한대를 구입, 교포들이 사는 곳을 찾아다니며 필수품 판매를 시작한 것이다. 이 사업은 날로 번창했다. 1922년 그의 나이 32세 때 신홍균 목사의 장녀인 19세인 매리와 결혼을 했다. 결혼 후에는 안정된 사업인 가구점을 오픈했고, 이후 부동산에 관심을 두고 부동산 브러커 자격을 받아내는 등 사업수완을 발휘했다. 이승만의 권유로 동지회에 가입한 후 그를 적극 후원하게 된 것이다. 이원순은 이승만 박사가 총재로 있는 대한인동지회 회장직을 맡았다. 이승만 박사의 외교독립운동을 헌신적으로 후원하였다. 이원순은 1932년 이승만이 제네바국제연맹 회의에 일본의 만행을 폭로하러 갈때 3천달러의 기금을 모아준 적이 있다. 그때 제네바에서 프란체스카를 만나 결혼하게 된 것이다. 임시정부는 1943년 이원순을 구미위원부 위원으로 임명했다. 30년을 살던 하와이를 떠나 워싱턴DC로 삶의 무대를 옮겼다. 모든 사업도 정리를 했다. 그리고 이승만 박사의 보좌역이 되었고 구미위원부는 임시정부의 승인을 받기 위해 루즈벨트 대통령에게 요청했지만 그 뜻을 이루지 못했다. 하지만 미육군전략처(OSS)의 미군 유격대에 동포청년 100명을 편입시킨 일, 미 우정성이 태극기를 도안으로 기념우표 발행하도록 한 일을 성공적으로 이루어냈다. 그후 워싱턴에서 열린 범태평양회의 참석 대표 문제로 이승만과 불화가 생겼고 끝내 결별하게 된 것이다. 워싱턴DC에서 뉴욕으로 다시 이주했고, 부동산 투자 등 계속 사업은 성장해 나갔다. 이원순은 1953년 9월 미국생활 40년을 청산하고 영주귀국을 했다. 1988년 7월에는 대한민국 건국 대통령 「인간 이승만」이라는 책을 펴냈다.

성명 : 이원순
훈격(연도) : 애국장(1991)
운동계열 : 미주방면
출생지 : 서울
생존기간 : 1890.10. 8 ~ 미상

서울 종로 사람이다. 1914년 보성전문학교를 졸업하고 하와이로 망명하여, 대한독립단에 가입, 박용만 단장의 비서 겸 재무담당의 직책을 맡아 활동했다. 1928년 박용만이 북경에서 암살된 뒤에는, 이승만이 조직한 대한인동지회에 가입하여 외교활동 및 독립운동 자금 조달에 전념했다. 한편으로는 태평양주보를 창간하여 그 주필로서 독립정신을 고취했으며, 상해 임시정부를 지원했다. 1934년 4월 18일에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주미제2행서 재무위원에 임명되어 하와이에서 인구세, 애국의연금 등을 모금하여 임시정부를 뒷받침했다. 1936년 문인화에게 재무위원을 인계할 때까지 하와이를 중심으로 활동했다. 1937년에 북경 노구교의 충돌로 중일전이 발생하게 되자 임시정부는 강소성 진강시로 이전했다. 1941년 4월 6일에는 민족대단결, 독립전선 역량 집중, 광복대업 촉성 등을 목적으로 해외한족대회준비회가 결성되었다. 4월 20일 하와이 호놀룰루에서 해외한족대회가 개최됨에 그는 안현경, 도진호와 함께 동지회중앙부 대표로 참가하였으며, 안원규, 차신호 등과 호놀룰루에 자리잡은 재미한족연합위원회 의사부 위원으로 선출되어 활동했다. 집행부는 로스앤젤리스에 두게 되었다. 1943년 8월 19일에는 임시정부 국무위원회에서 그를 주미외교위원부 위원으로 임명하여, 워싱턴에 주재하며 대미 외교활동과 독립금 모금을 계속하도록 했다. 정부는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수여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