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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안)혜련

남편 도산 안창호의 독립운동을 평생 도운 이(안)혜련

이(안)혜련이혜련은 국가와 민족을 위하여 자신의 가족까지 희생시키며 살아간 남편 도산 안창호를 지원하고 그 길을 따라갔다. 자녀교육을 위해 평생을 열심히 산 어머니이자 여성지도자이며 독립운동가였다. 이혜련이 결혼한 것은 1902년 9월. 도산 안창호는 23세, 이혜련은 17세였다. 주례는 구제학당 교장 밀러가 맡았고, 제중원(후에 세브란스병원)에서 화촉을 밝혔다. 한달 후 10월14일 교육학을 공부하러 온 남편 안창호와 함께 샌프란시스코에 도착, 76년을 로스앤젤레스에서 살아왔다. 이혜련은 리버사이드 파차파 캠프에 세워진 노동자 숙소에 살면서 처음으로 남편을 도와 노동을 했다. 일을 하면서도 신앙을 지키고 교회생활에도 항상 열심이었다. 1938년 도산의 서거후 5남매를 키우기 위해 재봉일 등살림을 도맡았다. 그리고 여성의 독립운동에도 항상 참여했다. 1946년 1월 대한여자애국단 제10대 총부단장이 되었고 큐바 동포를 구제하는 책임을 맡았다. 흥사단단우가 되었고 단우번호는 317번이다. 가족은 장남 안필립, 차남 안필선, 장녀 안수산, 차녀 안수라, 막내아들안필영의 5남매를 두었다. 그리고 남동생 두성과 극성 그리고 여동생 신실(정실)이 있다. 그리고 삼촌인 이암과 사촌인 이옥성과 가깝게 지냈다. 이혜련은 1969년 4월21일 로스앤젤리스에서 별세했다. 1973년 11월10일 서울 도산공원으로 이장되어 남편 옆에 묻혀 있다.

성명 : 이(안)혜련
훈격(연도) : 애족장(2008)
운동계열 : 미주방면
출생지 : 평안남도 강서
생존기간 : 1884. 4. 21 ~ 1969. 4. 21

평안남도 강서군에서 서당 훈장인 이석관의 장녀로 출생했다. 서울의 정신여학교에 입학하여 신학문을 배웠고, 그후 1902년 9월 3일 만 17세 때 서울 제중원에서 도산 안창호와 결혼했다. 결혼 직후 남편 안창호와 함께 미국으로 건너왔다. 샌프란시스코에서 안창호를 도와 공립협회를 결성하여 미주지역 한인사회를 지도하는 한편 국권회복운동을 주도했다. 이 시기 이혜련은 남편 도산 안창호가 독립운동에 전념할 수 있게 뒷바라지를 아끼지 않았다. 일제에 강점된 이후에도 안창호는 미국과 중국 · 러시아를 오가며 독립운동을 지도하고 있었는데, 아내인 이혜련은 도산이 조직한 대한인국민회를 지원하기 지속적으로 의연금, 국민의무금, 특별의연금 등 독립 운동자금을 모금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1919년 국내에서 3·1운동이 일어나면서 도산은 중국으로 가게 되었다. 3·1운동의 발발 소식에 접한 미주지역 한인들은 미국내에서 군자금을 모집하여 국내외 독립운동을 지원하였으며 미국국민과 정부에 우리의 독립을 호소했다. 미주지역 부인들도 활발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는데, 하와이에서는 1919년 4월 1일 대한부인구제회를 정식으로 결성했으며 본토에서도 여성들의 단체가 새롭게 결성되었다. 당시 로스앤젤리스에 거주하던 이혜련은 부인친애회를 조직하여 독립의연금 모금에 솔선수범했다. 당시 부인친애회에서는 한 주일에 2일(화, 금요일)은 고기없는 날, 한 주일에 하루(수요일)는 간장없는 날로 정하여 3·1운동으로 인해 고국에서 고통받는 동포들과 함께 하고자 했다. 한편, 새크라멘토의 한인부인회와 다뉴바의 신한부인회는 1919년 5월 18일 북미지역 부인회를 통합하기 위한 통고문을 보냈다. 이에 따라 8월 2일 각지의 부인 대표자들이 다뉴바에 모여 발기대회를 열고 합동을 결의했다. 이때 참석한 부인회는 다뉴바 신한부인회, 로스앤젤리스 부인친애회, 새크라멘토 한인부인회,샌프란시스코 한국부인회, 윌로우스 지방부인회 등으로 대표들이 참석하여 대한여자애국단을 결성하게 되었다.로스앤젤리스 부인친애회 대표로는 이혜련을 비롯하여 임메불, 박순애, 김혜원 등이 참석했다. 이와 같이 북미주의 4개 지방 부인단체들이 국민회 중앙총회에 청원하여 1919년 8월 5일 정식으로 대한여자애국단이 창단하게 된 것이다. 그후 이혜련은 대한여자애국단을 중심으로 국민의무금,국민회보조금, 특별의연 등의 모금을 주도하였고, 미국적십자사 로스앤젤리스 지부의 회원으로도 활동했다. 그러나 1932년 중국 상해에서 윤봉길의 투탄의거 직후남편 안창호가 일제에 의해 체포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같은 불행에도 불구하고 이혜련은 1933년 5월 9일 대한여자애국단 총부가 샌프란시스코에서 로스앤젤리스로 이전할 때 더 많은 역할을 담당했다. 당시 국내 옥중에 있던 안창호는 부인 이혜련에게 편지로나마 위안과 사랑의 마음을 전하고 있었다. 1937년 3월 대한인국민회가 로스앤젤리스에 총회관을 건립하면서 이혜련을 중심으로 한 여자애국단에서도 재정적으로 협조를 했다. 당시 이혜련은 대한여자애국단원의 일원으로 중일전쟁 재난민과 부상병들을 돕기 위하여 약품과 붕대를 모집했다. 그럴 즈음 일제는 안창호를 또 다시 체포하여 서대문형무소로 이송시켰다. 그러나 그는 건강이 급격히 악화되어 경성제국대학 병원에 입원했으나 1938년 3월 10일 순국했다. 이처럼 남편인 도산이 순국하였음에도 이혜련은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 열심히 여자애국단을 통한 항일전에 참여했다. 여자애국단에서는 중국 난민구제를 위해 구제금으로 78달러를 거두어 송미령에게 보냈으며, 또 송미령의 요청으로 1939년 12월 76달러를 송금했다. 이혜련의 자녀들은 로스앤젤리스에서 미국 국방에 협조하기 위해 장남 안필립과 안필선은 민병대에 입대했고 안수산은 미 해군 장교가 되었다. 조국이 독립된 이후인 1946년 1월 6일 로스앤젤리스 대한인국민회 총회관에서 신년도 대한여자애국단 총회가 개최되어 이혜련이 총부단장으로 선출되었다. 해방 이후에도 고국과 동포들을 위해 온 힘을 기울이다가 86세 생일인 1969년 4월 21일 별세했다. 정부는 2008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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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혜련 여사와 오남매. 앞줄 왼쪽부터 안수라, 이혜련, 안수산, 뒷줄 왼쪽 안필영, 안필립, 안필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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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산 안창호 부인 이혜련이 평생 사용한 재봉틀. 바느질로 번돈을 독립운동 기금으로냈다. 2014년 한국에 있는 도산 기념사업회에 기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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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산 안창호와 부인 이혜련은 서울 강남구 도산공원에 함께 묻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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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혜련의 남편 도산 안창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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