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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

외교독립론으로 민족지도자의 길 걸은 이승만 박사

이승만이승만 박사의 삶은 파란만장하다. 한말정부 타도혐의로 옥고를 치루었다. 석방후에는 1904년 유학으로 와서 미국 명문 최고학부를 나온 지식인이 되었다. 그리고 외교독립론을 30여년 펴나갔다. 그러나 많은 단체, 민족지도자들과의 불화가 끊이지를 않았다. 상해 임시정부 대통령으로 선출되었으나 탄핵을 받는 일이 일어났다. 대한인국민회와의 갈등도 오래 계속되었고 자신을 후원하는 동지회를 세웠다. 건국 초대 대통령이 된 후에는 반공으로 나라를 지켰다. 그러나 독재정치로 하야를 하는 비극을 맛보았다. 이승만은 자신의 전생애를 조국을 위해서 바쳤다. 일본으로부터 독립을 쟁취하는 것이 삶이 전부였다. 독립을 위한 민족운동 중에서 외교적으로나 정치적인방법에 의한 이승만의 외교독립론이 미국 주류사회에서 가장 주목을 받았다. 이승만이 우드로 윌슨 대통령에게 1919년 6월14일 다음과 같은 편지를 보낼 정도로 외교 활동은 뚜렸했다. “나는 대통령 각하에게 1919년 4월23일 서울에서 완전한 자율적 민주국가가 탄생했음을 알려드리게 된 것을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그리고 외교를 통해서 만이 대한의 독립을 쟁취할 수 있다는 철학으로 살았다.이승만은 한국의 자주독립과 문명발전의 방안으로 세가지를 주창했다. 첫째는 기독교를 받아드려 새로운 가치체계를 세워서 국민의 사상개혁을 이룩해야하고, 둘째는 서구 기독교국가들이 채택하고 있는 정치제도를 받아들여 제도적인 갱신을 성사시키며 셋째는 공명정대한 국제협약과 외교를 통해 대외적인 독립 보장을 받아야한다고 믿었다. 이승만은 3.1운동으로 상해 임시정부가 선포된 후 워싱턴에서 임시정부를 대표할 성설기구로 한국위원회를 설치하였는데 이것이 바로 구미위원부였다. 구미위원부가 그 기능을 십분발휘하기는 1941년 태평양전쟁이 일어난 직후였다. 상해 임시정부 대통령으로 선출된 후 이승만은 1920년부터 17개월동안 중국에 머물러 있었지만 처음 계획한 일들을 하지 못했다. 임시정부의 형편이 자금 고갈로 인해 몹시 혼란스러운 때였다. 대한인국민회와 의견충돌 후 이승만은 동지회라는 단체를 조직했다. 호놀룰루에 본부를 두고 로스앤젤리스에 지부를 뉴욕, 시카고, 샌프란시스코에 연락소를 두었다. 동지회의 찬조를 얻어서 1920년에는 태평양이라는 주간잡지를 창간했다. 미국에서 최고학부를 나온 이승만 박사는 자연스럽게 서구적 시각으로 국제정세를 볼 수 있었고, 미국 대통령 윌슨과의 교류 등 독립운동을 위한 민족지도자의 길을 걸었다. 국제적으로도 한국의 최고지도자로 평가를 받았다.

성명 : 이승만 (李承晩, Syngman Rhee)
훈격(연도) : 대한민국장(1949)
운동계열 : 임시정부
출생지 : 황해도 평산
생존기간 : 1875. 3. 26 ~ 1965. 7. 19

황해도 평산 사람이다. 3살 때 서울 남대문 밖 염동으로 이사를 왔다. 1894년에 신긍우의 권유로 배재학당에 입학했고, 미국인 선교사 부인에게 한국어를 가르쳐 주며 학비를 벌었다. 그는 배재학당에서 진보적인 개화당 관계의 청년들과 많이 접하게 되었으며 외국의 문물을 섭취, 자신도 진보적인 사상을 갖게 되었다. 1896년에 서울에서 서재필의 지도로 협성회를 조직했으며, 협성회보라는 주간신문을 발간하고 주필이 되어 정부에 대한날카로운 비판을 전개했다. 이에 따라 협성회보는 정부 탄압이 심해져 폐간되었고, 그 뒤 매일신문이라는 일간지를 발행하고 주필로서 계속 활동했다. 그 당시 독립협회는 서재필, 이상재, 남궁억이 주축이 되어 민권운동을 전개했으나 1898년에 황제의 노여움을 사 독립협회는 해산상태에 처하게 되었고 서재필은 미국으로 추방되었으며, 이상재와 남궁억도 체포되었다. 이때 그는 「광무황제는 연령이 높으시니 황태자에게 자리를 내 주셔야 한다」라고 하는 전단을 배포하였는데 그 혐의로 징역 7년형을 언도받고 옥고를 치렀다. 그는 이 감옥에서 그의 정치사상을 가장 잘 표현한 「독립정신」이라는 책을 저술하게 되었는데 그 내용을 살펴보면, 첫째로 「세계와 마땅히 통하여야 할 줄로 안다」고 하여 국제간의 외교, 다른 나라와의 통상, 외국인과의 친선 등을 강조하고 있다. 둘째로 「새 법으로써 각각 몸과 집안과 나라를 보전하는 근본을 삼을 것」이라고 하여 주로 새 질서 추구, 생활개선, 낡은 사고방식에서의 탈피 등을 주장했다. 셋째로 「외교를 잘 할 줄 알아야 한다」는 전제를 붙여 놓고 국제사회와의 균등한 외교를 확보함으로써만 약소국은 열강에 끼어 살 수 있다고 표현하고 있다. 넷째로 「국권을 존중히 여겨야 한다」고 강조하면서 치외법권을 물리칠 것, 민족적 자존심을 가질 것, 국기를 소중히 여길 것, 외국에 입적하지말 것 등을 강조하고 있다. 다섯째는 「의리를 존중하라」고 하면서 정의와 대의에 죽을 줄 알아야 한다고 하여 국가에 대한 국민적 모랄을 강조했다. 여섯째는 「자유권을 중히 여길지라」하여 민주주의의 기본인 개개인의 자유, 평등과 이를 확보하기 위한 권리, 의무에의 충실을 강조하고 있다. 1904년 노일전쟁이 발생하고 민영환 등 혁신파가 정권을 잡게 되자 7년만에 석방되어 11월에 미국으로 왔다. 그는 1905년부터 1910년까지 조지 워싱턴 대학, 하바드 대학, 프린스턴 대학 등에서 공부를 한 뒤 1910년에 귀국했다. 1912년 세계감리교총회 한국대표로 임명되어 다시 미국으로 왔다. 이 총회의 연설에서 그는 기독교정신과 민주주의 이념인 자유·평등·인류애에 호소하면서 일본에게 약육강식 당한 한국의 실정을 소개하고 국제 여론은 마땅히 한국을 불합리한 상태로부터 해방시키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라고 호소했다. 그는 주로 하와이에 근거를 두고 「한국·태평양」이라는 신문을 발간했다. 1918년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자 윌슨 대통령이 제창한 민족자결주의에 힘입어 동지들과의 연락 아래 대표를 파리강화회의에 참석하도록 진력하여 김규식등이 그 회의에 참석하는데 도움을 주었다. 1919년 3·1독립운동이 일어나고 4월에 상해에서 임시정부가 수립되자 대통령으로 추대되었다. 1921년 5월에는 워싱턴 군축회의에 참석하여 일본의 침략상을 폭로했으며 1933년 제네바 국제연맹회의에 참석하여 일본의 한국 병탄과 만주 침략의 부당성을 폭로했다. 1934년에 오스트리아 여성인 프란체스카 여사와 결혼했다. 1940년 12월 8일 일본의 진주만 공격으로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자 임시정부 구미위원장이던 그는 VOA를 통하여 국민들의 단결을 호소하는 육성방송을 실시하여 희망과 용기를 북돋았다. 1945년 8월 15일 일본의 항복으로 광복을 맞이하게 되자 1945년 10월 16일에 귀국하여, 「뭉치고 엉키라.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못 사나니 다같이 하나로 뭉치자」고 역설했다. 1948년에 대한민국 정부수립을 국내외에 선포하고 초대 대통령에 취임했다. 정부는 1949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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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 박사와 프란체스카 여사가 신혼여행을 마치고 호놀룰루항에 도착했다. (1935년 1월2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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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시정부 집정관 총재 이승만과 구미위원부 위원장 김규식. (191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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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8년 7월24일 초대 대통령 취임식에서 연설하는 이승만 박사 (이승만의 삶과 꿈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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