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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살음

다뉴바에서 목회, 이승만 박사 지원한 이살음 목사

이살음이살음 목사는 대한인국민회 샌프란시스코지방회 서기로 처음 참여했다. 후에는 동지회로 옮기고 이승만 박사의 독립운동을 후원했다. 1917년 도미했고 1919년 3월20일 신한민보 편집인에 취임했다. 그는 대한인노동사회개진당을 조직하고 수령이 되었다. 중가주지역에서는 그를 수령이라고 불렀다. 이살음 목사는 1944년에는 동지회 북미총회장에 올랐다. 다뉴바에서 식품상을 경영하면서 한인장로교회 담임목사로 목회를 했다. 이승만 박사는 대통령이 된 뒤에 이살음 목사에게 여러번 입각을 요청했다. 그러나 그는 미국에서 할 일이 많다고 장관직을 고사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살음 목사는 2014년 11월14일 리들리 공원묘지에서 대전 국립묘지로 이장되었다. 가족으로는 두 아들이 있다. 2012년 10월5일 LA총영사관에서 훈장 전수식이 있었고 친손자 더글라스 이 목사등이 이 자리에 참석했다.

성명 : 이살음
훈격(연도) : 애국장(2011)
운동계열 : 미주방면
출생지 : 미상
생존기간 : 1892. 8. 15 ~ 1966. 2. 25

1917년 12월부터 1918년 1월까지 대한인국민회 샌프란시스코지방회 서기를 지냈다. 1919년 3월에는 신한민보 편집인
으로 활동했다. 같은 해 5월 대한인국민회 북미지방총회 학무원 및 법무원을 역임했다. 7월에는 신한민보 통신원을, 10
월에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산하단체 구미위원부 임시지방위원을 지냈다. 1920년 3월부터 1923년 2월까지 노동사회개
진당의 지도자로 월간지 동무를 발간하는 등의 활동을 했고, 1930년 3월 중가주 대한인공동회 부회장을 역임했다. 1931년 12월~1933년 4월에 열린 미주한인연합회에 중가주 공동회 대표로 참석했다. 이후 1933년 1월 미주한인연합회 의장, 1936년 7월 대한인국민회 총회 특별대의원회에서 위원규칙 기초위원, 1941년 1월 대한인국민회 중앙집행위원, 1944년 2월부터 11월까지 동지회 북미총회 총회장, 1944년 11월 임시정부 워싱턴 주미외교위원회 위원 등을 역임했다. 1945년 4월 샌프란시스코 국제안전조직회의에 이승만 박사와 함께 임시정부 대표로 참석했다. 1918년부터 1942년까지 지속적으로 독립의연금을 납부했다. 정부는 2011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