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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범영

동지회맨으로 평생 이승만 박사 재정을 후원한 이범영

이범영이범영은 이승만 박사 독립운동 대열에 평생동안 참가한 동지회맨이다. 1977년 11월5일 저자와 인터뷰를 할때 “독립운동은 돈이 없으면 못하지. 워싱턴에 있던 구미위원부가 우리의 독립을 위해 활동하므로 돈을 거두어주는 일만 했어.”라고 자랑스럽게 말했다. 서울에서 관립영어학교를 졸업하고 진명여자학교와 인천중화학원에 영어교사로 재직했다. 1913년 20세에 유학으로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했다. 이범영은 바로 다뉴바로 가서 포도 따는 일을 했다. 이때 대한인국민회에 가입도 했다. 3.1만세운동이 일어난 후 그의 삶이 변했다. 나를 위해서 살기보다 나라찾는데 나서기로 했다. 그 길이 바로 독립기금을 모으는 일이었다. 돈을 걷는대로 이승만 박사의 구미위원부로 보냈다. 중가주 다뉴바에서 대한인국민회 지방회장을 지냈다. 포도장사를 하면서 한인이 거주하는 지역이라면 어디던지 찾아다니며 독립기금을 모았다. 처음은 국민회 회원이었으나 동지회와 이승만 박사의 길을 따랐다. 이승만 대통령의 부름을 받고 한국으로 귀국했고, 1954년 10월 진해에서 열린 아세아반공연맹 창설을 도왔다. 이에 앞서 대통령 특사로 동남아를 순방했다. 미국에 있던 메리 여사가 서울에 가있는 남편에게 뷰익차를 보냈는데 이범영은 이 차를 타고 다녀서 서울장안의 화제가 되기도 했다. 이범영은 1982년 12월 3일 로스앤젤리스에서 별세, 그린힐스 메모리얼 파크에 안장되었다. 부인 메리 이 여사의 딸 로즈 서, 아들 에드윈 리가 있다.

성명 : 이범영
훈격(연도) : 건국포장(2011)
운동계열 : 미주방면
출생지 : 서울 서대문
생존기간 : 1892. 5. 23 ~ 1982. 12. 3

서울 출신이다. 1919년 3월 대한인국민회 다뉴바 지방회 회장으로 3,1독립선언을 지지하는 전문을 발표하고, 1919년부터 1944년에 이르기까지 대한민국 임시정부등에 독립운동을 위한 의연금을 지속적으로 전달했다. 1919년 12월 캘리포니아에서 조소앙의 외교운동을 후원할 목적으로 노동사회개진당을 조직해 활동했다. 1929년 나성지방동지회 회원으로 활동하면서 이승만 박사환영회의 개회사를 맡기도 했다. 1932년 샌프란시스코에서 구미위원부 후원활동을 전개하고, 1943년 9월 북미시보 주필로도 활동했다. 정부는 2011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애국지사 이범영(앞줄 오른쪽에서 두번째)이 LA시 현기식 행사에 참석했다. (1970년 8월15일)

애국지사 이범영(앞줄 오른쪽에서 두번째)이 LA시 현기식 행사에 참석했다. (1970년 8월15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