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회를 미국 정부로부터 공인받은 민족지도자 이대위 목사
이대위 목사는 샌프란시스코에서 대한인국민회가 창립된 후 도산 안창호 다음으로 가장 훌륭한 민족지도자이자 독립운동가로 평가받고 있다. 초기이민교회 목회를 위해 헌신했고, 국민회를 가정부로 미국 국무부로부터 인정을 받아내는 일을 이루어 냈다. 장인환 전명운 의사 변호를 위해 모금에 나섰다. 그리고 신한민보를 가장 발전시킨 언론인이었다. 2세를 위한 국어교육에도 열심이었다. 유학으로 1903년 22세의 젊은 나이로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한 이대위는 1910년 1월부터 대한인국민회 북미지방총회 부회장으로 국민회의 기초를 닦는데 헌신했다. 같은 해 7월 일제의 한국 강점이 강행되자 이를 저지하기 위해 애국동맹단을 조직했다. 번역원으로 선임되어 하와이 지방총회 연서를 일본 천황에게 반대 서한을 발송하는 일을 했다. 그리고 미국으로 망명을 오는 애국지사와 유학생의 신분보증과 이민국 수속에 대변인이 되어서 많은 도움을 주었다. 1913년 5월14일에 버클리대학에서 한국인으로 처음 사회학 학사학위를 받았다. 1911년 이대위 전도사는 상항한인교회에 부임했고, 1928년 6월까지 17년간 긴 세월 목회를 했다. 미주 한인사회와 대한인국민회는 한국 근대사에서 아주 특별한 위치와 의미를 지니고 있다. 1910년대 미주 한인 사회는 일본 제국주의가 팽창되어 갈 때 미주에서 항일민족운동을 전개하며 한국문제에 관한 세계여론을 주도하였다. 특히 대한인국민회는 상해 임시정부 수립 전단계의 민족독립운동의 최고중추기관으로 해외에서 성립한 임시정부를 뜻하는 가정부라 할 수 있는 중요한 위상과 그에 따른 역할을 수행해갔다. 이와같은 과정에서 한인사회의 민족주의는 성장하였고, 새 시대의 사조인 민주주의는 민족주의와 조화를 이루면서 발전해 나갔던것이다. 바로 이와같이 중요한 시기에 대한인국민회를 실질적인 민족운동 단체로 이끌어 갔던 지도자가 바로 이대위 목사였다.1915년 이대위 목사는 미주언론사의 역사의 한장으로 기록할 수 있는 인터타입 한글식자기를 발명했다. 문선을 통해서 만들던 신한민보에 활자의 혁명을 가져온 것이다. 국문 자모를 몸소 만들었고, 이에 동포들이 모금해 준 돈으로 기계를 사서 독창적인 한글식자기로 발전시켰다. 민족운동에 투신, 1910년대와 1920년대를 통해서 미주한인사회 전체를 이끌어나간 민족지도자로서 실질적이고 중심적인 역할을 잘 수행해 갔다. 이대위 국민회 총회장은 1914년 4월 대한인국민회를 캘리포니아 주정부로부터 사단법인으로 정식 인정을 받았고, 국민회는 망명자치정부의 역할을 1945년 광복의 날까지 이어갔다. 1928년 6월17일 부인과 4형제가 지켜보는 가운데 49세의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동포들은 평안하지요.보고 싶어요.」가 그가 남긴 마지막 말이다. 샌프란시스코 사이프러스 공동묘지에 묻혔다가 2005년 대전 국립묘지로 이장되었다.
성명 : 이대위 (李大爲 David Lee)
훈격(연도) : 독립장(1995)
운동계열 : 미주방면
출생지 : 평안남도 강서
생존기간 : 미상 ~ 1928.6.17
평남 강서 사람이다. 평양에서 출생하여 기독교 학교인 숭실중학교를 졸업한 후, 유학을 목적으로 미국으로 이민을 왔다. 1903년 9월 샌프란시스코에서 안창호, 장경등과 함께 미주 한인단체의 효시인 친목회를 결성하고 동포간 연락과 친목을 위주로 활동하면서 한인사회의 생활개선운동을 전개했다. 그 후 1905년 4월 안창호 등과 함께 미주 최초의 민족운동기관인 공립협회를 조직하여 항일운동과 동족상애를 목적으로 활동을 전개하는 한편, 1906년 4월에는 상항한인감리교회를 창립하여 한인 동포들의 구호사업과 교육계몽운동, 직업 알선 등의 활동을 수행해 나갔다. 1908년 6월 오레곤주 포트랜드 아카데미를 졸업한 뒤, 같은 해 12월 상항한인감리교회에서 미국내 한국어 출판의 효시인 『대도』라는 기독교 잡지 주필로 월보를 발행하여 배부 본국과 세계의 정세를 전달하는 한편, 기독교의 복음 전도 및 동포 교양에 공헌하였다.또한 같은 해 10월부터 최정익 등과 함께 하와이와 미주 본토에 있는 한인단체를 통일할 것을 논의한뒤 1909년 2월 미주 공립협회 대표로 참석하여 미주 유일의 통일적 한인민족운동기관인 대한인국민회를 창립하는데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그리고 UC버클리대학에 재학 중이던 1910년 2월 대한인국민회 북미지방총회 부회장으로 선임된 그 해 7월 일제의 한국 강점이 현실화되자, 대한인국민회북미지방총회 명의로 각지방대표자들을 소집하여 애국동맹단을 조직하고, 번역원으로 선임되어 하와이 지방총회와 연서로 일본 천황에게 한국 강점을 강력히 반대하는 서한을 발송했다. 또한 국권회복을 위해 각 지방에 독립군양성소를 설립하고 이에 필요한 재원을 마련하고자 노력하는 한편, 미국으로 망명해오는 애국지사와 신도 유학생들을 위해 신원보증을 서거나 이민국 수속을 위해 대변인으로 헌신을 다했다. 1911년 상항한인감리교회 담임목사로 취임한 그는 예배친교봉사회를 조직하여 교포들의 애국운동과 정치활동의 중심지로 변모시키는 동시에 1912년 11월 해외 한인의 최고통일기관인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가 결성되자, 국민회 북미지방총회 대표로 참석하여 임시정부의 역할을 수행하는데 노력했다. 1913년 2월 대한인국민회 북미지방총회 회장, 6월에는 「신한민보」주필로 선임된 그는 언론을 통한 한인교포의 계몽운동과 항일독립운동, 민족교육운동 등에 힘쓰며 한인사회의 결속을 강화시켜 나갔다. 또한 같은 해 6월 리버사이드 Hemet에서 한인노동자들이 영국인 농장으로 일하러 갔다가 일본인으로 오인되어 쫓겨난 사건이 발생하자 주미일본공사가 한인들의 노동문제를 해결해 주겠다며 해외 한인들을 일본의 지배하에 두려는 의도를 보였다. 이에 총회장이었던 그는 미국 국무장관 브라이언에게 서한을 보내어 일본공사의 간섭행위를 강력히 항의하고 한인사회에 대한 간섭행위를 하지 않겠다는 서약을 받아달라고 요청하여 이를 인정한다는 허락을 받아냈다. 이에 따라 1914년 4월 미 국무장관은 물론 캘리포니아 주정부로부터 대한인국민회 북미지방총회를 사단법인으로 정식 인정받음으로써 재미한인의 대표기관으로 대우를 받음과 동시에 미주내 망명자치정부로서 활동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는데 혁혁한 공을 세웠다. 1915년 2월 대한인국민회 북미지방총회장으로 재선된 그는 같은 해 3월 국문자모를 몸소 만들고, 독창적인 인터타입 한글식자기를 발명하여 문선을 통해 만들던 기존 신문에 활자의 혁명을 일으켰다. 이 기계로 국민회 북미지방총회에서는 1915년부터 1970년까지 신한민보를 제작하였다. 또한 망명객을 위한 숙식과 일자리를 마련해 주는 한편, 70여 명의 사진결혼 신부들의 결혼식 주례를 몸소 서 주기도 하였던 그는 1916년 한인 최초로 UC버클리대학을 졸업한 뒤 산앤젤모에 소재한 태평양신학교를 졸업했다. 1918년 2월 대한인국민회 북미지방총회 회장으로 선출된 그는 한인사회 지도자로서 역량을 마음껏 발휘하는한편, 1919년 대한독립선언에 참여하여 한국의 독립운동에 적극 참여했다. 1919년 8월 워싱턴으로 가서 이승만을 만나 구미주차외교위원회 설립문제를 논의했고, 1921년 3월 김규식, 송헌주 등과 함께 구미위원부를 설치하고 위원회의 사무장으로 임명되어 외교와 독립 선전활동에 주력하다가 과로로 인해 서거했다. 정부는1995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