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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병구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장을 역임한 윤병구 목사

윤병구윤병구 목사는 1910년대와 1920년대초까지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장을 두번이나 역임한 국민회의 핵심인물이다. 헤이그 통역 등 외교활동에 탁월한 능력을 발휘한 한인사회의 지도자이자 이민목회자였다. 구한말 외국어학교를 졸업했고 선교사 통역으로 활동했다. 하와이 이민자들이 한국에 목사파송을 요청하자 1903년 10월5일 호놀룰루에 도착했다. 8월4일에는 이승만과 함께 뉴욕 롱아일랜드 오이스터만 별장에 휴양중이던 루즈벨트 대통령을 찾아가서 한국독립 청원서를 제출했다. 윤병구 목사는 이승만과 의형제를 맺었고 동생으로 평생 동지적 관계로 가깝게 지내왔다. 두 사람의 첫 만남은 서울에 있을 때부터 이루어졌다. 윤병구 목사는 로아노크대학에서 공부하던 송헌주와 함께 헤이그 만국회의에 한국특사 이준, 이상설, 이위종 3인을 위한 통역으로 합류했다. 두분은 하와이로 오기전 서울에서부터 잘 알고 지내던 친우사이 였다. 윤병구 목사와 송헌주가 통역을 담당하는 한국특사로 합류할 수 있었던 것은 덴버에서 활동중인 박용만의 적극적인 주선과 재정적인 후원이 있었기 때문이다. 1907년 6월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대한제국 특사 이상설과 이위종이 1907년 8월1일 뉴욕에 도착한 뒤 공부하고 있는 윤병구 목사와 송헌주와 합류했다. 이준 특사의 갑작스런 죽음과 일제의 방해공작으로 만국평화회의의 참석이 좌절되자 구미열강을 상대로 하는 구국외교로 방향을 바꾸기로 하고 미국에 돌아왔다. 윤병구 목사는 1910년부터 기독교 월간잡지 대도(大道) 주필 겸 대한인국민회 북미지방총회를중심으로 합방반대 임시의장으로 회의를 주재하며 결의문을 작성했다.1919년 3월15일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의 지방외교원으로 임명되어 한국 독립을설명하며 지방을 순회하고 다녔다. 1919년 4월14일 필라델피아에서 열린 한인대회에 참석하고 파리 평화회의의 대표중 한사람으로 선출되기도 했다. 1923 ~ 25년 리들리한인교회, 1927 ~ 1930년 뉴욕한인교회 담임으로 열심히 목회를 하면서 독립운동을 후원했다. 해방후 1949년 2월 이승만 대통령 초청으로 46년만에 귀국, 외무부와 공보부 고문으로 일하다가 이해6월20일 69세를 일기로 서울에서 별세했다. 장례식은 6월24일 새문안교회에서 대한민국정부장으로 거행되었다. 이승만 대통령이 직접 참석했다. 윤병구 목사는 외아들 프랭크 윤을 두었다. 그는 2차대전중 미군에 복무했고, 캘리포니아 주정부 농업담당 공무원으로 일했다.

성명 : 윤병구
훈격(연도) : 독립장(1977)
운동계열 : 미주방면
출생지 : 경기도 양주
생존기간 : 1880.12.22 ~ 1949. 6.20

경기도 양주 사람이다. 일찍이 미국으로 와서, 멀리 이역 땅에 있으면서도 기울어져가는 조국의 앞날을 염려하며 구국운동을 벌여 교포간의 친목 단결과 독립운동을 위한 조직을 만들었다. 1903년 8월 하와이의 호놀룰루에서 예수교 감리교인 홍승하, 박윤섭, 문홍섭, 임치성, 임형주, 김정극, 안정수, 이교담 등과 함께 신민회를 조직했다. 홍승하가 회장에 추대되어 일제의 침략 행위에 대항하고 동족간의 단결, 민지의 계발, 국정쇄신을 부르짖으며 행동을 전개했다. 또한 이듬해에 일부 미국인 협잡배들이 하와이 일대에 있는 우리 이민 교포들을 상대로 당치도 않은 이민 경비를 받으려는데 대하여 전면적으로 반대 투쟁을 전개, 이주 동포들의 권익 옹호에 앞장서기도 했다. 신민회의 뒤를 이어서 하와이 오아후섬의 에와농장에서 다시 정원명, 김성구, 이만춘, 김규섭, 강영소 등 동지들을 규합하여 에와친목회를 발족시키고 정원명을 회장으로 추대했다. 그리고 항일운동과 동족상애를 목적으로 친목을 도모했다. 그 중에도 1905년 7월에 미국 포츠머스에서 러시아, 일본간의 강화회의가 개최되자 에와친목회에서는 로스앤젤리스 공립협회와 연합하여 한국대표를 파견키로 했다. 이때 그가 선발되어 국권수호를 위한 외교활동을 전개했다. 1910년에는 군소단체로는 큰힘을 낼 수 없고 또 대외적인 위신을 세울 필요가 있는현실을 깨닫게 됨에 따라 각 단체의 지도자들은 군소단체의 통합운동을 전개하게 되었다. 결국 재미 한인단체의 통합을 보게 되어, 1910년 2월 1일에 재미 한인교포 자치단체인 대한인국민회를 발족했다. 이 단체는 중앙총회 사무소를 샌프란시스코에 두고 각지에 지방총회와 지방회를 두었다. 대한인국민회는 지방분권제인 대의원제를 택하여 각 지방에서 선출한 대표의 회의인 중앙총회에서 국민회 전체를 운영케 하였으며, 부속기관으로 경찰도 두었다. 이당시 윤병구 목사는 박상하, 정원명과 함께 하와이 지방총회 대표로 참석했다. 1920년에는 대한인국민회 회장으로 피선되어 부회장으로 당선된 백일규와 함께 국민회를 이끌었다. 회원은 8천명 가량이었으며, 이들이 의무적으로 의연금을 내어 국민회를 운영했으며 상해에 있는 임시정부에서 매년 2천달러 내지 3천달러를 지원했다. 1919년 4월에는 필라델피아에서 한인대회가 열렸는데, 임시정부에서는 그를 비롯하여 송헌주, 김호 등 재미인사 9명을 연합국회의에 참가할 대표로 지명하기도 했다. 그러나 1921년이 되자 국민회는 경비난을 겪게 되어 회장직에 있던 윤병구 목사는 사임하였으며 국민회는 활동이 약화되었다. 이후 미주지역에서 목사로 재직하면서 활동하다가 1945년 4월에는 국제연합 결성에 참가할 임시정부 대표단으로 이승만, 임병직 등과 함께 선발되기도 했다. 정부는 1977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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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이그 밀사 통역으로 네델란드에 간 윤병구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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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병구 목사와 부인 아그네스 오, 그리고 아들 프랭크 윤 (1940년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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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동작동 국립묘지의 윤병구 목사 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