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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일한

독립운동가이자 국제 사업가로 우뚝 선 유일한

유일한유일한은 일제에 항거한 독립운동가이자 공익사업의 선구자이다. 전재산의 사회환원을 실천한 사회사업가이다. 장학 및 교육사업을 펼친 민족교육가의 길을 걸었다. 일제하에서 가난과 질병으로 신음하고 있는 우리 민족을 위하여 “건강한 국민만이 잃었던 주권을 되찾을 수 있다”는 신념으로 제약사업을 통한 건강입국의 의지를 실천에 옮겼다. 그는 지혜와 용기, 그리고 통찰력으로 한시대를 앞서가는 선각자로의 삶을 살았다. 유일한은 9살 어린 나이인 1904년 미국 유학길에 올랐다. 네브라스카주 커니시에서 국민학교에 입학했고, 14살에는 박용만의 소년병학교에 들어가서 군사훈련을 받았다. 21세가 된 1919년에는 미시간대학 상과를 졸업하고 사업가의 길에 나섰다. 1년후에는 중국식당에서 쓰는 숙주나물장사를 시작하고, 미국인 친구와 라초이(La Choy Co.)회사를 설립한 후 성공한다. 숙주대왕이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다. 미시간대학에 다닐 때 필라델피아에서 한인대회가 열렸고 이에 적극 동참하면서 대한독립 선언문을 작성, 미국에 널리 알렸다. 이때 유일한은 의장인 서재필 박사를 알게 되었고, 그후 자주 만나면서 스승처럼 크고 작은 일들을 상의를 했다. 1924년 국제무역회사인 유한주식회사를 세웠는데 이때 사장으로 서재필 박사를 모실 정도로 존경했다. 1925년 중국계인 호미리와 결혼을 했고, 유일한은 영주귀국하기로 결정했다. 이때 서재필 박사의 딸 뮤리엘이 유일한에게 버들표 목각을 선물했고 이 인연으로 버들표가 훗날 유한양행의 심볼이 되었다. 유일한은 1926년 영주귀국을 했을 때에 식민지배하에있는 조선에 필요한 것을 세가지로 보았다. 첫째는 교육의 보급이고, 다음은 일자리를 만드는 것, 셋째는 국민의 보건문제가 시급하다는 것이다. 또한 세브란스의전 에비슨 박사로부터 연희전문 교수로 그리고 부인은 세브란스의전 소아과 과장으로 일해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그러나 사업가의 길을 계속 걷기로 했다. 1938년 4월 구라파 및 남북미대륙 시찰여행에 올랐고 1941년 12월 8일 일본 진주만 공격으로 2차대전이 격화되면서 귀국을 미루었다. 유일한은 가족과 로스앤젤리스에 잠시 거처를 마련하고, 남가주대학(USC)에서 경영학 석사과정을 공부했다. 미육군전략처(OSS)의 한반도 침투작전에 한국지역 담당으로 미국의 승전 활동에 나섰다. 미국에서 8년만인 1946년 7월 귀국했다. 그리고 고국에서 사업에 전념하고 제약회사를 유한양행의 주종사업으로 정하고 수출사업을 확대해 나간다. 1967년 한국에서는 최초로 항생물질 생산회사를 설립했다. 유일한은 1971년 3월11일 76세를 일기로 별세했다. 유한양행은 그의 탄생 100주년을 맞아 「나라사랑의 참 기업인 유일한」이라는 저서를 펴냈다.

성명 : 유일한
훈격(연도) : 독립장(1995)
운동계열 : 미주방면
출생지 : 평양
생존기간 : 1894.12.13 ~ 1971. 3.11

평양에서 출생하여 박용만의 숙부 박장현이 평안도 선천에 설립한 사립학교에서 박용만으로부터 국어, 일어, 산술, 중국고전 등을 배웠다. 1905년 2월 박장현과 박용만이 독립운동을 목적으로 미국행을 결심하자, 이들의 제자였던 정순만의 아들 정양필, 이종철, 정한경, 유은상, 이희경, 이종희 등 후일 한인소년병학교 동반자들과 함께 도미길에 올랐다. 도미 후 1906년경 박장현, 정한경, 정양필 등과 함께 미주 중서부지역인 네브라스카주 커니시에 이주한 그는 1909년 6월 박용만이 헤이스팅스에 설립한 미국내 최초의 한인소년병학교에 입교하여 본격적인 군사훈련을 받는 한편, 1911년 헤이스팅스중학교에 입학하여 3년만에 졸업했다. 1916년 미시건대학 상과에 입학한 그는 졸업반이던 1919년 4월,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에서 독립운동 후원과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선전을 목적으로 필라델피아에서 한인대회를 개최하게 되자, 재미한국인 대표로 선출되어 대회에 참가했다. 대회에서 기초작성의원회 대의원으로 선출된 그는 「한국국민의 목적과 열망을 석명하는 결의문」을 작성 낭독하여 한국의 독립을 세계열강에 호소했다. 1919년 대학을 졸업한 이듬해, 세계적인 전기회사인 제너럴 일렉트릭사의 회계사로 근무하면서 1920년 한국친우회(The League of the Friends of Korea) 보스톤지부 비서로 활동하면서 한국친구회에 운영자금을 기부하고, 미국인들을 대상으로 한국친구회의 가입을 권유하는 등 동회의 활동을 적극 후원했다. 그 후 1922년 대학동창생인 스미스와 함께 숙주나물 통조림을 생산하는 라초이(La Choy) 식품회사를 설립하여 크게 성공하자, 1924년 국제무역회사인 유한주식회사를 설립하고 사장에 서재필을 임명했다. 그리고 이듬해인 1925년 숙주나물 원료인녹두 구매차 중국 상해를 거쳐 북간도지역을 순회하며 21년만에 헤어진 가족과 상봉하기도 했다. 1925년 세브란스의과대학 에비슨 학장으로부터 연희전문학교 교수로 초청을 받은 그는 회사를 정리하고 1926년 귀국했다. 귀국 후 12월 서울 종로에서 유한양행을 창립하고 초대사장에 취임하여 의약품·위생·화장품·농기구·염료 등 사업을 다각화하여 큰 성공을 거두었다. 특히 1928년 동아일보 지상에 최초의 염료 광고, 최초의 약품광고를 게재하여 큰 수익을 올리는 사업 수단을 발휘하는 한편, 보스톤에서 『한국에서의 소년시절(When I was a boy in Korea)』이란 책자를 출간하여 외국인들에게 한국의 실상을 간접적으로 홍보하는 활동을 했다. 그 후 세계 각국과 교역을 하며 회사를 성장시킨 그는 귀국한 지 12년 되던 해인 1938년 4월 재차 도미하여 사업 활성에 전력하는 한편, 1941년 남가주대학(USC)대학원에서 경영학 석사를 취득하기도 했다. 1939년 중국에서 한인독립운동단체인 광복진선과 민족전선이 하나로 통합되고 중·일간의 전쟁이 고조되던 즈음인 1940년 9월 북미 대한인국민회는, 미주와 하와이 각 단체 대표자들에게 연석회의를 개최하여 시국대책을 강구할 것을 제의했다. 유일한은 1941년 4월 20일 하와이 호놀룰루에서 미국내 각 한인단체 대표들이 모여 개최한 해외한족대회의 결의에 따라 같은 해 8월 미주내 모든 단체를 통합한 재미한족연합위원회가 조직되었다. 로스앤젤리스에 설치된 재미한족연합위원회 집행부 위원으로 선임된 그는 대한민국임시정부의 후원과 외교 및 선전사업을 추진했다. 또한 12월에는 재미한족연합위원회 집행부 위원으로 미국 육군사령부의 허가를 얻어 캘리포니아주 민병대 소속으로 일명 맹호군인 한인국방경위대를 편성하는데 적극 후원했다. 1942년 당시 미육군 전략처(OSS)의 한국담당 고문으로 활약하며 펄벅과 교유하기도 한 그는 8월 로스앤젤리스 시청 앞에서 맹호군 창설과 함께 진행된 현기식에 참여하여 이승만과 대한민국임시정부 외무부장 조소앙 등의 축사를 낭독하는 등 맹호군 창설과 현기식을 주도적으로 이끌었다. 한편, 같은 해 10월 미국정부 전략청에서 재미한족연합위원회 기획연구부 위원장이었던 그에게 전략청의 전쟁 수행에 도움을 주는 연구서 작성을 권유하자, 1943년 11월 맹호군 사령관 김용성, 국방과장 송헌주 등과 함께 한국인이 태평양전쟁에 보다 유효하게 참가하기 위한 「한국과 태평양전쟁(Korea & Pacific War)」이란 비망록을 작성, 간행하여 한국독립의 당위성을 홍보하는 동시에 지속적으로 군자금을 출연하여 독립자금을 적극 후원하기도 했다. 1944년 11월 아시아와 아메리카란 잡지에 한국과의 교역을 권한다(Do Business with Korea)라는 기고문을 게재하여 한국의 실정을 세계에 널리 홍보하였으며, 1945년 1월에는 버지니아주 핫스프링에서 태평양연안 12개국 대표 160명이 참석한 IRP(Institute of Pacific Relation) 회의에 정한경, 전경무 등과 함께 한국 대표로 참석하여 우리의 독립 당위성을 강조하는 모임을 개최하고 한국의 독립문제를 공론화하는 외교적 성과를 이룩했다. 또한 곧이어 1월 미군의 한국침투작전의 하나인 냅코(NAPKO) 작전계획에 따라 캘리포니아주에 특수공작을 위한 한인훈련부대가 설치되자, 이에 입대하여 제1조 책임자로 선임되어 무기, 비무장전추법, 지도읽기, 파괴, 무전, 촬영, 낙하산훈련, 비밀먹 사용법, 선전, 일본인의 특성 등에 대한 훈련을 받으며 임시정부의 OSS작전과 양면작전을 전개하여 국내 침투하려고 했으나, 일본군의 항복으로 인해 국내침투작전은 좌절되었다. 유일한은 1946년 귀국하여 유한양행을 민족자본 산업으로 육성하는 한편, 육영사업에도 혼신의 힘을 기울였다. 정부는 1995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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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일한이 1946년 가족과 함께 귀국했다. 왼쪽부터 맏딸 재라와 부인 호미리. 그리고 맏아들 일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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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후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버지니아에서 열린 IPR총회에 한국 대표로 참석한 대표들. 왼쪽부터 전경무, 태유림, 오웬 라트모어, 유일한, 프레드릴 휘태, 정한경. (194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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