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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창호

겨레의 큰 스승, 미주 독립운동 지도자 도산 안창호

안창호남가주는 도산 안창호의 나라사랑 체취가 물씬 풍기는 곳이다. 리버사이드 오렌지밭에서 노동을 하며 흥사단 창단의 꿈을 키웠다. 그때 그 자리에는 도산 안창호 동상이 세워져서 독립운동의 정신을 말하고 있다. 1909년에 창립한 대한인국민회 사업을 펴나가는 기념재단은 도산의 삶을 전시하고 교육을 하고 있다. 로스앤젤리스에서 도산이 부인 이혜련 여사 그리고 5남매가 함께 산 세월은 모두 13년 2개월이다. 세차례에 걸쳐서 미주에 체류했다. 오늘 후손들이 아버지 정신을 이어가고 있다. 도산은 오렌지 하나를 정성스럽게 따는 것도 애국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밥을 먹어도 대한의 독립을 위해, 잠을자도 대한의 독립 만을 생각한다는 민족지도자. 그가 바로 도산 안창호이다. 그의 직업은 독립운동가였다. 도산은 1905년 샌프란시스코에서 독립운동 단체인 공립협회를 창립했다. 1909년에는 임시정부 역할을 맡은 국민회를 그리고 1913년 흥사단을 창단했다. 1919년 8월 5일, 중가주 다뉴바에서 대한여자애국단의 창단을 도왔다. 도산 안창호의 국권회복은 바로 우리 민족의 실력양성론으로부터 시작된다. 도산 안창호 사상을 체계화한 안병욱 교수(숭실대·작고)는 “그의 가슴에는 뜨거운 애국혼이 있었다. 그의 머리에는 투철한 민족자주사상이 있었다. 그의 얼굴에는 따뜻한 사랑이 있었고, 그의 손에는 務實力行의 실천이 있었다. 그의 발에는 동포들을 위한 헌신적 봉사가 있었다. 그의 눈은 민족의 백년대계를 내다보는 통찰력이 있었고, 그의 입에는 진실의 말씀이 있었다. 그의 귀에는 역사의 맥박소리를 조용히 듣는 슬기가 있었다. “고 표현했다.도산 안창호와 이혜련 여사는 장남 안필립, 차남 안필선, 장녀 안수산, 차녀 안수라, 유복자인 안필영 등 3남2녀를 낳았다. 로스앤젤리스에 사는 도산의 후예는 오늘 4대까지 뻗어나가고 있다. 도산의 나라사랑 마음과 독립운동 정신, 흥사단 비전이 또다른 100년의 미래를 향해 나가고 있다. 빙그레 웃는 사회, 죽어도 거짓이 없는 사회를 만드는 것이 오늘 한인사회에 맡겨진 역사적인 사명이다. 그리고 하루 빨리 통일을 이루어서 도산이 낳고 자라고 배운 땅 평양을 마음껏 오가는 날이 와야한다. 통일의 그날이 빨리 오도록 함께 나아가는 것이 도산 안창호의 독립정신을 활짝 꽃피우는 것이다.

성명 : 안창호
훈격(연도) : 대한민국장(1962)
운동계열 : 임시정부
출생지 : 평안남도 강서
생존기간 : 1878. 11. 9 ~ 1938. 3. 10

평안남도 강서 사람이다. 1894년 상경하여 구세학당에서 수학했다. 1898년 독립협회에 가입하고, 만민공동회로 발전함에 따라 평양에서 관서지부를 발기했다. 쾌재정에서 만민공동회를 개최하여 국민의 자각을 호소했다. 1899년에는 강서군 동진면 암화리에 점진학교를 설립하고 황무지 개간사업도 병행해서 추진했다. 1902년 미국으로 유학을 왔고 로스앤젤리스에서 한인친목회를 조직하고 회장에 선출되었다. 1905년에는 한인친목회를 발전시켜 공립협회를 창립하여 상부상조 조국광복을 목적으로 초대회장에 취임하여 공립신보를 발행하는 등 활동했다. 1907년 고국의 실정을 알아보기 위하여 귀국했고, 양기탁, 안태국, 이승훈등과 비밀결사 신민회를 조직한 뒤 평양에 대성학교를 설립하는 한편 각 주요 도시에 태극서관을 두고, 자기회사(磁器會社)를 차리는 등 정치·교육·문화의 여러방면에 걸친 애국계몽운동을 전개했다. 1909년에는 청년학우회를 창설하여 청년운동을 전개했다. 안중근 의거에 관련되었다는 혐의로 용산헌병대에 수개월간 수감되기도 했다. 1910년 일제 통감부의 도산내각 조직 권유를 일축하고, 거국가를 남긴 후 중국으로 망명했다. 다음 해 북만주에서 무관학교를 세우려고 했으나 뜻대로 되지 않자 다시 미국으로 돌아가, 1912년 샌프란시스코에서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를 조직했다. 그리고 흥사단 조직에 착수하여 무실역행, 건전인격, 단결훈련, 국민개업 등 정신개조를 목표로 한 민족계몽운동을 전개했다. 공립신문을 신한민보로 표제를 바꾸어 발행했다.1919년 2월에는 샌프란시스코에서 국민대회를 개최하고 파리강화회의에 국민회 대표를 파견할 계획을 추진했다. 국내에서 3·1독립운동이 일어나고 상해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수립되어 그를 내무총장에 선임하자 상해로 건너갔다. 임시정부 내무총장 겸 국무총리 서리에 취임한 그는 연통제 실시, 독립신문 발간 등 독립운동의 방략을 지도했다. 같은 해 7월 2일에는 임시 사료편찬회를 구성하고 총재가 되어 한일관계사료 전4권을 편찬, 발행했다. 또한 임시정부 재정이 어려워지자 임시정부후원회를 조직하여 해외 교포들로부터 군자금을 출연받아 임정을 꾸려나가도록 했다. 같은 해 임정의 내각 개편으로 국무위원 노동부 총판에 임명되었다. 1920년에는 흥사단 원동위원부를 설치하고, 미국 국회의원 시찰단준비위원장이되어 북경에서 한국의 독립을 호소했다. 8월에는 지방선전총판이 되어 민족의 단합을 호소하는 격문을 만주 등지에 배포했다. 또한 임시정부의 세력 통일을 위하여 노력하다가 실효를 거두지 못하자 국무위원을 인책 사임하고 국민대표회의 소집을 추진했다. 1921년에 서울에 수양동맹회, 평양에 동우구락부를 설립하도록 했고, 뒤에 이 두 단체가 합하여 수양동우회가 되었다. 1923년 상해에서 국민대표회의가 열리자 부의장에 선임되었으나, 이 회의도 임시정부 개조파와 창조파로 대립되어 실패하자, 북만주에 독립운동기지인 이상촌 건립을 추진했다. 그의 독립운동 방략은 군사, 외교,재정,문화,식산,통일의 6대운동으로 후에 민족의 통일단합을 위한 대독립당을 결성하여 이를 실행할 것을 시도했다. 1924년에는 남경에서 동명학원을 설립하여 실력배양운동의 기초를 다졌다. 이 해에 그는 군자금 확보를 위하여 미국으로 건너갔다가 1926년에 돌아왔다. 중국에 돌아온 후 만주 일대를 답사하며 이상촌 후보지를 물색하고, 민족유일당 조직, 농민호조사 발기 등 구체적인 사업계획을 추진하였으나, 삼시협정이 체결되어 독립군의주요 간부인 김동삼, 박창식 등이 일경에게 체포된 뒤에, 김좌진, 정신 등이 암살되는 수난이 계속되었다. 상해로 되돌아 온 그는 1930년에 협동상조, 소비합작, 신용생산 등으로 생활역량을 넓히기 위한 동인호조사를 조직하여 재상해한인의 합심 협력을 계획했다. 1931년 1월에는 흥사단 제17회 원동대회를 주재하여 대회장으로 선출되었으며, 흥사단보를 발행하는 등 민족의 부흥과발전을 위한 국민의 자질 혁신과 청년인재양성 등 흥사단의 이념구현에 주력했다. 그리고 애국부인회가 흥사단의 취지에 따라 군자금 모집계획을 세우자 설립목적이 동일한 동인호조사와 합병하여 공평사로 개칭하고, 이사장에 취임하여 생활 역량을 증강시키기 위한 소비, 신용, 생산 등의 합작운동을 추진했다. 같은 해 만보산사건으로 한중인(韓中人) 충돌사건이 일어나고 중국민의 한인에 대한 감정이 악화되자 병인의용대, 노병회, 교민단, 학우회, 여자청년동맹, 애국부인회, 청년동맹 등의 각 단체를 연합하여 상해한인단체연합회를 조직하게 되자 그는 흥사단 대표로 이에 참가하여 중국과 공동으로 항일투쟁을 강화했다. 1931년 10월에는 이시영, 김사집, 김철과 함께 교민단 심판원으로 활동했다. 1932년 4월29일 윤봉길의 홍구공원 의거에 따라 일경은 프랑스 조계 경찰의 협조로 독립운동가의 일제 점거를 실시했다. 그는 이러한 정보를 알고서도 어린 소년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 상해 하비로에 있는 이유필의 집을 방문했다가 잠복하고 있던 일경에게 체포되었다. 본국으로 압송되었고, 12월19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4년형을 받았다. “앞으로도 독립운동을 할 작정인가?”하는 물음에 도산은 “나는 밥을 먹어도, 잠을 자도 민족을 위해 먹고 잤으니, 앞으로 민족을 위해 일하고자 함은 변함이 없다.”고 기개를 꺾이지 않았다. 1935년 2월 대전감옥에서 출옥한 그는 일경의 감시를 받으면서도 지방을 순회하며 계몽 강연을 했다. 그후, 평남 대보산에 은거하여 이상촌 건설을 계획했으나 1937년 6월 수양동우회 관계로 다시 일경에 체포되었다. 옥살이를 하던 중 중병이 들어 12월에 보석으로 출옥했으나 건강을 회복하지못하고 1938년 3월 10일 서거했다. 정부는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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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산 안창호의 여권. 대한외부(外部)에서 발행한 집조로 미주에서 가장 오래되었다. (여권번호 5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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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산 안창호. 리버사이드 농장에서 오렌지를 따는 노동을 했다. 이때 오렌지 하나를 정성껏 따는 것도 애국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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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버사이드 오렌지농장에서 기념사진을 찍어주는 도산 안창호. (오른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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멕시코 방문할 때의 도산 안창호 (1917년) (도산 안창호 전집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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