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와이에서 독립운동과 이민목회를 한 안창호 목사
안창호 목사는 독립운동과 이민목회를 위한 삶을 살았다. 애국과 국민계몽운동 그리고 신앙을 통해서 나라를 찾을 수 있다고 믿고 독립운동에 나섰다. 안창호 목사는 남양주에서 태어났다. 배재고등학교를 졸업했고, 인천 내리교회 영화학교 교사를 지냈다. 1919년에는 천안지방 순회목사 겸 천안교회 담임목사로 시무했다. 3.1독립만세운동이 일어나자 주동적인 역할을 담당했다. 특히 유관순 오빠를 집에 숨겨주는 등 애국운동을 하다가 일경에 구금되었고 공주감옥에서 6개월간 옥고를 치루었다. 일경의 미행으로 진남포 사리원 등지로 옮겨가면서 목회를 했다. 1926년 6월10일 하와이로 망명길을 택했다. 그리고 1927년 3월 와히아와교회 담임목사로 임명되었고, 주일학교 교재를 만들어 교포2세의 민족교육에 앞장을 섰다. 1920년말부터는 상해 임시정부 재정지원의 역할을 맡아서 윤봉길 의거를 위해 직접 송금을 했다. 백범 김구의 특무공작에 찬성하여 1931년 11월15일에 1천달러를 보냈다. 그 자금으로 백범은 폭탄을 만들어 이봉창 의사에게 주었고 그는 1932년 1월8일 동경 한복판에서 일본 천황에게 폭탄을 던졌다. 1936년 백범 김구의 통일전선에 동참한다는 의미로 설립된 애국단은 한국독립당 하와이지부로 이름을 바꾸었다. 당 규정에는 원동에서 특무공작을 경제적으로 부담한다는 것을 명시했다. 안창호 목사는 임시정부와 김구를 성심껏 지원했다. 1945년 11월 귀국한 김구는 수행비서를 통해 토종닭 두마리를 서울에 살고 있는 안창호 목사 모친에게 전달할 정도로 특별한 관계였다. 안창호 목사는 1946년 2월 재미한족연합위원회 하와이대표 9명으로 귀국, 6개월간 체류하기도 했다. 1966년 12월30일 호놀룰루에서 향년 81세로 별세했다. 남양주 고향 선친 묘역에 묻혀 있다가 2002년 대전 국립묘지로 이장되었다. 1901년 최병헌 권사의 딸 최배세와 결혼했고 세자녀 례아, 신아, 철영을 두었다. 역사연구가 안형주씨는 친할아버지인 안창호 목사의 자료집을 2012년에 발간했다.
성명 : 안창호
훈격(연도) : 건국포장(1993)
운동계열 : 미주방면
출생지 : 경기도 남양주
생존기간 : 1884. 1. 5 ~ 1969.12.31
1919년 4월 전국적으로 3·1독립운동의 열기가 고조되어 갈 때 공주의 만세시위 운동을 선도한 인물 가운데한 사람이었다. 공주에 소재한 기독교계 학교인 영명학교에서 김관회 등과 회합을 갖고 4월 1일 장날을 기회로 독립만세 집회를 열 것을 협의하다가 소위 보안법 및 출판법 위반으로 검거되었다가 1919년 8월 29일 석방되었다. 그 뒤 하와이로 건너와서 목사로 재직하면서 독립운동을 벌였다. 1932년 5월 22일 감리교당에 40여 명의 한인이 모여 상해에서 건너온 현순 목사로부터 윤봉길의 홍구공원 의거의 전말을 소상히 듣고 후원회를 조직했다. 매년 12달러씩을 출연할 것을 약속하는 등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독립운동자금 모금운동에 앞장 섰다. 1934년 4월에는 원동의 특무공작활동을 후원하던 비밀결사로 1932년부터 하와이지방에 조직되어 있던 하와이 애국단에 가입, 단의 사업을 더욱 확장하는데 힘썼다. 정부는 1993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