찹수이 도매업으로 성공 후 이승만 박사를 도운 안재창
안재창은 경기도 양주 사람이다. 1903년 1월13일 30세 나이에 첫 이민선을 타고 102명의 노동이민자와 함께 하와이에 도착했다. 중국 음식인 찹수이로 큰 돈을 번 입지전적인 사업가였고, 돈을 버는대로 이승만 박사의 재정후원을 했다. 안재창은 지역사회 지도자였다. 카리스마가 있는 개화기 독립협회 소장파인 박용만을 지도자로 섬기고 성원했다. 하와이로 온 후에는 이승만을 후원했다. 안재창은 1907년 3월 샌프란시스코로 윤병구와 함께 이주했다. 1907년 6월 솔트레이크로 이사를 가서 3년간 있으면서 첫 1년반은 노동을, 그리고 정원사로 일하면서 저녁에는 성인학교에서 영어를 배웠다. 1910년 12월 네브라스카주 링컨으로 이주하여 박용만, 최경오와 투자하여 농장을 경영했다. 그리고 박용만의 한인소년병학교를 지원했다. 그리고 1916년에는 네브라스카주 한인거류민회 회장이 되었다. 안재창은 정양필, 조오흥 3인이 1922년 합자로 디트로이트에서 찹수이 도매회사인 정안회사를 설립했다. 1925년에는 주식회사로 변경하고 새 건물을 건축하고 재산은 30만달러에 이르는 큰 자본을 모았다. 남궁염의 권유로 워싱턴DC에 있는 구미위원부에서 대한민국 시민이라는 신분증을 발급받았다. 그리고 이승만을 지지하는동지회에 가입했다. 디트로이트에서 1942년에는 대한인국민회 지부를 세우기도 했다. 1963년 11월20일 90세를 일기로 별세했다. 안재창은 부인 안유순과 장남 광호, 장녀 기영, 막내 서영을 두었다. 역사연구가 안형주는 종증조부인 안재창의 삶을 추적한 「1902년, 조선인 하와이 이민선을 타다」라는 책을 2013년 펴냈다.
성명 : 안재창
훈격(연도) : 애족장(1998)
운동계열 : 미주방면
출생지 : 경기도 양주
생존기간 : 1873.12.10 ~ 1963.11.20
1903년 미국으로 와서 미주한인사회를 중심으로 독립운동을 전개했다. 1907년 국내에서 국채보상운동이 일어나자 이 운동에 적극 동참했다. 그럼에도 국운이 기울어지게 되자 미주지역에서는 독립전쟁에 대비한 사관양성의 군사운동이 일어났고, 1909년 박용만이 한인소년병학교가 그것이었다. 재미 유학생을 비롯한 한인 청소년을 대상으로 하계학교 체제로 운영되었던 한인소년병학교는 3년 과정으로 1914년까지 6회에 걸쳐 100여 명의 사관생도를 배출했다. 그는 군사양성기관의 운영에 필요한 재정자금이 필요했는데, 이같은 재정자금을 지원하고자 후원회를 조직하여 한인소년병학교의 활동을 지원했다. 또한 디트로이트 지방의 한인사회를 이끌면서 1929년 동지회 디트로이트지회, 1942년 대한인국민회 디트로이트 지방회 등을 조직했다. 독립운동에 대한 재정적 지원활동을 꾸준히 전개했다. 정부는 1998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