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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원규

대한인국민회 하와이지방 총회장 안원규

안원규성명 : 안원규
훈격(연도) : 독립장(1995)
운동계열 : 미주방면
출생지 : 미상
생존기간 : 1880 ~ 미상

경기도 파주 사람이다. 대한제국 말기 노동이민자로 하와이에 도착했다. 1906년 3월 하와이 오하우지방 와이파후 농장에서 환난구호와 일화배척을 목적으로 공동회를 조직하고 회장으로 선임되어 동포들의 자치생활을 지도했다. 그 후 1907년 9월 하와이 각 지방에 분립되었던 24개 단체를 하나로 통합하기 위해 대표자 30명이 호놀룰루에서 합동발기대회를 개최하자 대회에 참석하여 한인합성협회를 조직했다. 부회장으로 선임되어 조국의 국권 회복과 한인동포들의 안녕 보장, 민족교육 장려를 위해 헌신했다. 1908년 11월 공립협회와 통합하여 미주 전역의 유일한 한인민족운동단체를 조직하기 위한 발기인 모임에 한인합성협회 발기인으로 참여하여 1909년 2월대한인국민회를 창립하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같은 해 7월 대한인국민회 하와이 지방총회 부회장을 역임하고, 1910년 4월에는 총회장으로 선임되어 하와이 지방총회를 이끌었다. 그러던 중 1910년 7월 일제의 한국강점이 현실화되자, 하와이 각 지방 대표자들을 호놀룰루에 소집시켜 대동공진단을 조직했다. 재무로 선임되어 대한인국민회 북미총회와 연서로 일본 왕에게 일제의 한국 강점을 강력히 반대하는 서한을 발송하는 한편, 국권회복을 위해 각 지방에 독립군양성소를 설립하고 이에 필요한 재원을 마련하고자 했다. 이에 따라 1914년 6월, 하와이 대한인국민회의 연무부 사업을 후원하기 위해 박종수와 함께 하와이 오아후 가할루 지방에 있던 약 1,500에이커의 파인애플 농장을 기부하여 박용만을 단장으로 하는 대조선국민군단의 창립을 적극 후원했다. 이승만이 1921년 3월 하와이 국민회를 해산시키고 1922년 3월 상해 임시정부의 임시거류민단령에 의하여 하와이 대한인교민단을 조직하자, 부회장으로 선출되어 하와이 각지에 지부를 설치하고 분열된 한인사회를 통합하기 위해 노력했다. 1933년 1월 하와이 대한인교민단을 해체하고 하와이 대한인국민회를 재건하여 분열된 한인사회를 수습하게 되자, 1936년 1월 부회장으로 선출되었다. 국민부담금제도를 통해 국민회의 채무를 청산하는 한편, 혈성금제도를 실시하여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경상비를 조달했다. 1939년 중국의 한인독립운동단체인 광복진선과 민족전선이 하나로 통합되고 중·일간의 전쟁이 고조되자, 이에 영향을 받은 북미 대한인국민회에서는 1940년 9월 미주와 하와이 각 단체 대표자들이 연석회의를 개최하여 시국대책을 강구할 것을 하와이 대한인국민회와 동지회에 제의했다. 이에따라 1941년 4월 20일 하와이 호놀룰루에서 미국내 각 한인단체 대표들이 모여 해외한족대회를 개최하자, 하와이 대한인국민회 대표로 참석한 그는 의장으로 선출되어 선언문과 해외한족대회 결의안을 작성하는 한편, 독립전선 통일문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승인문제, 대미외교기관의 설치문제, 군사운동에 관한 문제, 미국 국방공작 후원문제, 연합기관 설치문제, 독립금 수봉문제등을 결의했다. 이 결의에 따라 같은 해 8월 미주내 모든 단체들을 통합한 재미한족연합위원회가 조직되고 하와이 호놀룰루에 재미한족연합위원회 의사부가 설치되자, 의사부 위원으로 선임되어 대한민국임시정부 후원과 외교 및 선전사업을 힘있게 추진했다. 한편, 1943년 9월 이승만 계열의 동지회가 재미한족연합위원회를 탈퇴한후 1944년 6월 독자적으로 외교위원부를 설치하여 활동하자 재미한족연합위원회도 별도의 외교사무소를 개설하고 외교사무를 전개했다. 1945년 1월 하와이 대한인국민회 총회장에 당선된 데 이어 이듬해인 1946년 1월에도 재차 총회장에 당선되는 등 40여 년간 조국의 독립과 하와이 한인사회를 위해 헌신했다. 정부는 1995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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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원규와 이화학당 출신 안정송의 결혼식 (191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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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정송은 1919년 1월에 호놀룰루에 왔고, 한인 YWCA 회장, 대한부인구제회 회장을 지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