멕시코에서 미주로 이주한 후 독립운동을 한 신광희
신광희는 경상남도 문경 사람이다. 서울로 이사한 뒤 3년동안 대한제국 군대에 들어가 시위대 하사로 근무했다. 1905년 멕시코 유카탄의 메리다 농장으로 이민을 떠났다. 2년간 중노동을 했고, 국민회 메리다 지방회 설립에 참여했다. 그리고 3년간 메리다 국민회 사무원으로 일했다. 1914년 멕시코에서 캘리포니아로 이주했다. 이해 11월29일 흥사단에 입단했다. 단우번호는 57번. 신광희는 북가주에서 농토를 임대하여 한때 쌀 농사를 크게지었다. 마침 윌로스비행학교가 세워졌고, 재무로 근무를 했다. 그는 무장독립운동을 후원했고, 1920년 11월18일 임시정부에 독립운동 자금 1천달러이상을 냈다. 신광희는 1941년 7월30일 베이커스필드 양로원에서 별세했다. 향년 63세.
성명 : 신광희
훈격(연도) : 애족장 (1995)
운동계열 : 미주방면
출생지 : 경상남도 문경
생존기간 : 미상
1905년 영국인 마야스가 멕시코의 어저귀농장에 한국인을 노예이민 보내기 위해 한국에서 대륙식산회사를 경영하던 일본인과 협잡하여 한국인을 모집할 때 응모하여 멕시코로 노예이민을 왔다. 멕시코 도착 후 어저귀농장 등에서 4년간 고역을 치른 뒤, 1908년 이근영 등 8인과 함께 농장주에게 1백달러씩을 주고 계약 1년 전에 풀려났다. 같은 해 5월 12일 멕시코 한인감리교회를 설립한 그는 10월 전도회를 조직하여 멕시코 한인동포들의 생활을 구제, 지도하는 한편, 미국의 민족운동단체인 공립협회와 연락을 취하며 멕시코 한인들의 구제에 힘썼다. 1909년 4월 15일 계약만기와 함께 멕시코 한인 동포들이 해방되자, 미주 대한인국민회에서 파견된 특파원 황사용 등의 도움으로 멕시코 메리다 지방의 한인 동포들을 결속하여 대한인국민회 메리다지방회를 조직하고 민족운동과 동포들의 자치운동을 전개했다. 그 후 멕시코 동란으로 미 본토로 이주한 그는 1920년 대한인국민회 북미지방총회 실업부원으로 활동하는 한편, 2월 대한민국임시정부 군무총장 노백린 등이 캘리포니아주 윌로스에 비행사양성소를 설립하자 이에 가입했다. 비행사양성소에서 약 4년간 재무로 활동한 그는 비행기 2대를 매입하여 50여 명의 학생들에게 둔전병식 군대교련을 통해 항일 무장투쟁의 사관들을 배출하는 한편, 1920년 대한민국임시정부에 독립운동 자금으로 1천달러 이상을 후원하여 임시정부 재무부로부터 감사장을받는 등 민족운동을 위해 헌신적으로 노력했다. 정부는 1995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수여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