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생 이승만 박사의 독립운동을 적극 후원한 송 철
송철은 이승만 박사에 대한 존경심이 끝이 없다. 평생을 이승만 박사의 뜻에 따라 산 철저한 동지회 맨이다. 사업으로 번 돈을 이승만 박사의 독립운동과 동지회 사업을 위해서 썼다. 대한인동지회 북미총회관 건물 구입 모금 운동에 앞장 섰고 해방 후에는 총회장에 선출 되었다. 한인사회를 위한 봉사에도 열심이었다. 송철은 1894년 동학혁명이 일어난 해에 전라북도 금산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동학혁명에 참여한 후 피신 생활을 할 때였다. 1911년 여름 전주 신흥중학교에 다닐 때 이승만 박사가 강연을 왔다. “배움에는 노예가 없다. 밤낮으로 노력하여 새로운 민족역사를 창조하자”는 내용의 연설을 듣고, 삶에 큰 변화가 찾아왔다. 이때 어린 송철 학생은 나도 열심히 공부하여 이 박사처럼 민족을 위하여 대성하리라고 다짐을 했다. 이것이 송철과 이승만 박사의 첫 만남으로 70여년을 이승만 박사를 위해서 충성되게 살아왔다. 송철은 유학길에 올랐고 1917년 7월24일 호놀룰루에 도착. 이승만 박사가 경영하던 태평양 잡지사를 직접 찾아갔다. 이때 이승만 박사는 42세, 송철은 23세였다. 이 박사는 “열심히 많이 배워서 민족을 위한 동량이 되라”고 격려했고 한평생 이 말을 실천하며 살아왔다. 미국에 와서는 고등학교부터 다시 공부를 했다. 그리고UC버클리를 마쳤다. 1927년 중가주 다뉴바에서 과일 패킹하우스와 도매상을 김용중과 시작을 했고 크게 성공, 60년째 경영을 했다. 천안에 독립기념관을 설립할 때에는 1천5백달러를 냈다. 그는 작고하기전 미국에 와서 산70평생의 이야기를 「송철 회고록」이라는 제목의 자서전을 남겼다. 1986년 2월27일 향년 93세를 일기로 별세했다. 잉글우드묘지에 묻혀 있다. 부인 로즈 송여사와 세아들 레오 송, 유진 송, 게리 송을 두고 있다.
성명 : 송 철
훈격(연도) : 애국장(1994)
운동계열 : 미주방면
출생지 : 전라북도 금산
생존기간 : 1896. 1.23 ~ 1986. 2.27
송철은 금산 사람이다. 전주 신흥학교와 군산 영명학교를 졸업하고 모교인 신흥학교에서 수학, 물리학을 가르쳤다. 1916년 중국 상해를 거쳐 미국으로 망명한 이후 캘리포니아 패사데나에 있는 폴리텍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U.C.L.A와 버클리대학 등에서 전기수력학을 전공했다. 한편 도미 이후 이승만이 주도하던 동지회에 가입, 적극적인 활동을 펼쳐 나갔다. 특히 1929년 여름에는 뉴욕, 시카고, 로스앤젤리스, 몬타나, 오레곤 등지의 5개지부 대표가 로스앤젤리스에서 회합, 대한인동지회 북미총회를 결성할 때, 이살음, 임병직 등과 같이 로스앤젤리스 대표로 이 회합에 참석했다. 하와이의 동지회에서 독립하여 별도로 조직된 이와 같은 동지회 북미총회에서는 시종일관 재정 분야를 담임하였을 뿐만 아니라, 이살음, 박호근의 뒤를 이어 총회장을 역임하는 등 북미총회에서 핵심적 역할을 수행했다. 특히, 1943년 4월에는 10여 년간의 모연 적립금 4천달러를 기반으로 2천달러의 은행 융자를 받아 로스앤젤리스 36가 1112번지에 대한인동지회 북미총회 회관을 마련하는 데 중추역할을 맡았다. 이와 동시에 그 기관지로 속쇄판인 「북미시보」 발행에도 참여했다. 한편 1941년 4월 20일에는 하와이 호놀룰루에서 해외한족대회가 개최되어 독립전선 통일, 임시정부 봉대, 군사운동 등을 비롯해 항일독립운동 전반에 관한 문제가 토의 결의되었다. 그리고 그 결과로 재미한족연합위원회가 결성되고 호놀룰루에는 위원회의 의사부가, 로스앤젤리스에는 집행부가 각각 구성될 때, 그는 집행부의 위원(총 14명)으로 선출되어 활동했다. 또한 재미한족연합위원회 국방과에서 100명 이상의 한인지원병을 확보하여 1942년 2월 경위군(일명 맹호군)을 조직하였을 때, 참위 계급으로 주계과(主計科)를 맡아 재정문제를 담당했다. 경위군은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인준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캘리포니아 주정부의 인가까지 받아 미주 한인의 상무 기백을 모아 독립운동에 기여하기 위해 편성되었던 것이다. 비록 미군의 지휘를 받는 미국내의 군대였지만,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대일전쟁에서 해외한인 의용군의 기간부대가 되어 즉시 출동하는 것이 목표였던 것이다. 1944, 5년 양년에는 전후 3회에걸쳐 독립금 3백달러를 출연, 「한인 된 의무」를 성실히 이행했으며, 광복 직전인 1945년 7월 1일 열린 제1회 동지회 미국대표대회에 몬타나지방 대표로 참석하기도했다. 정부는 1994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