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년간 독립운동의 큰 사명을 맡은 송헌주
송헌주의 독립운동은 참으로 역사적이었다. 1905년부터 광복의 날까지 40년간 독립운동의 가장 중요하고 큰 일이 있을 때마다 부름을 받고 나가 그 책임을 잘 수행했다. 송헌주의 독립운동을 위한 역할은 위대했지만 그 공적은 제대로 평가가 되지 않고 있다. 1904년 하와이에 도착을 했다. 1905년 한인상조회 회장을 맡으면서 나라사랑과 국권회복의 길에 들어섰다. 로아노크대학에서 공부하던 송헌주는 1907년 7월 이준, 이상설, 이위종의 헤이그 밀사를 위한 통역관으로 러시아를 거쳐 네델란드로 향했다. 대한제국은 1906년 3월 송헌주에게 직접 여권을 발급해 주면서 밀명을 수행하도록 했다. 1905년에는 하와이 이민국에서 사무직원으로 근무했다. 등 영어를 유창하게 했기 때문에 부름을 받은 것이 확실하다. 미국 감리교단의 안수집사인 송헌주는 1916년부터 1917년에는 하와이한인감리교회 제4대 담임으로 청빙을 받는다. 그만큼 미국 교계의 신임과 지도력을 평가했기 때문으로 볼 수 있다. 미국에서의 독립운동중 세차례나 이승만과의 특별한 만남이 이루어졌다. 하와이한인기독학원에서 함께 일을했고 1919년 3.1만세후 만들어진 구미위원부에는 이승만의 요청으로 위원직을 1년간 맡았다. 그리고 두번째는 1944년 11월21일 대한민국 중경 임시정부가 워싱턴DC에 주미외교위원회를 설치했을 때 이승만은 위원장으로, 송헌주는 위원으로 함께 외교업무를 맡았다. 그리고 1945년 4월25일에는 샌프란시스코에서 열린 연합국회의(UN)에 임시정부 대표로 이승만이 위원장, 송헌주는 5명 위원중 한명으로 선임되어 대한의 독립을 요청하는 외교업무를 함께 맡았다. 하지만 송헌주는 오랜기간 대한인국민회를 통해서 독립운동을 했고 이승만 박사의 동지회에는 참여를 하지 않은 것도 특별하다.무엇보다도 김규식과 송헌주는 참으로 특별한 관계이다. 로아노크대학에서 같이 공부를 했고 의형제를 맺을정도였다. 구미위원부에서 김규식은 위원장으로 그리고 송헌주는 위원으로 같이재임했으나 이승만 임시대통령이 송헌주를 해임하자 김규식은 위원장직을 내려놓았다. 제퍼슨가의 대한인국민회 북미총회관 건축 때인 1938년 위원장을 맡아서 큰 역사를 이루어 냈다. 송헌주는 1939년과 1943년에는 대한인국민회 중앙집행위원장에 선출되면서 미국의 참전 지원과 임시정부 승인의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그리고 재미한족연합위원회에 대한인국민회 대표로 참석하면서 국방과장을 맡았다. 무엇보다도 그의 역할중 가장 중용한 것은 바로 미주에서 독립기금을 모아서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보낸 일이었다. 해방 후 여러차례 귀국을 시도했던 송헌주는 얼마 후 김구 선생의 암살소식을 접하면서 참담한 심정으로 모든 외부 활동을 끊었다. 1965년 7월31일 LA에서 별세했고, 지금 로즈데일 묘지에 잠들어 있다. 가족으로는 양아들 Young Song과 친외손자 김동국 그리고 판사인 마크김 외증손자가 있다. 국가보훈처는 2015년 7월을 독립운동가 송헌주의 달로 정하고 독립운동 세미나를 개최했다. 송헌주는 “우리가 할 일은 아니하고 남의 힘으로 독립을 이룰 수 없다”는 명언을 남겼다.
성명 : 송헌주 (宋憲澍, Hurn Ju Song)
훈격(연도) : 독립장(1995)
운동계열 : 미주방면
출생지 : 서울시 마포구 공덕동
생존기간 : 1880.10.22 ~ 1965. 7.31
경기도 고양(현재 마포구 공덕동) 사람이다. 구한말 관립영어학교를 졸업한 뒤, 1904년경 하와이로 건너와서 1905년 하와이섬 고할라 지역에서 목사로서 「교회월보」를 발행했다. 한편, 같은 해 8월 하와이 호놀룰루에서 하와이 지역 각 지방 한인들을 규합하여 한인상조회를 조직하고 회장으로 선임되어 한인 동포들의 자치생활을 지도했다. 그 후 미 본토로 건너온 그는 1907년 버지니아주 로아노크대학에 입학하여 공부하던 중, 1907년 7월 초순 광무황제의 밀명을 받아 헤이그 만국평화 회의에 참석한 이상설, 이위종 등의 밀사를 돕기 위해 네덜란드 헤이그로 건너가 통역관으로 활동했다. 한국의 독립을 호소하다가 1908년 3월 다시 뉴욕으로 귀환했다. 그 후 1910년 다시 로아노크대학에 복학하여 1914년 졸업했다. 이듬해 뉴저지주의 프린스턴대학에 입학하여 석사학위를 취득하고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1919년 미국 워싱턴에서 이승만이 조직한 대한민국임시정부 구미위원부 위원으로 임명되어 이듬해인 1920년 6월 하와이로 파견된 그는 애국공채를 발매하고 독립운동자금을 모집하여 임시정부의 재정을 후원했다. 또한 이승만과 함께 한인학교를 설립하여 교사이자 목사로 활동하면서 민족교육을 실시했다. 1934년 4월 대한민국임시정부 임시의정원 상임위원회에서 로스앤젤리스 재무부 주미 제4행서 재무위원으로 선임된 그는 중국 항주로 이전한 임시정부를 후원하기위해 애국의연금을 모집 송금하기도 했다. 1936년 5월 분열된 북미지역 한인민족운동단체의 부흥을 위해 소집된 각 지방 대표자회의에 참석하여 북미 대한인국민회를 재건하고 미주 한인사회의 부흥과 항일운동, 임시정부의 재정 후원을 도모했다. 이 때 대한인국민회의 면모를 일신하기 위해 추진된 대한인국민회 총회관 건축위원장으로 선정되어 1938년 4월 총회관을 낙성하는데 헌신했다. 1939년 중국에서 한인독립운동단체인 광복진선과 민족전선이 하나로 통합되고 중 일간의 전쟁이 고조되던 즈음에 북미 대한인국민회 총회장으로 선임된 그는 북미 대한인국민회 임원들과 함께 1940년 9월 미주와하와이 각 단체 대표자들에게, 연석회의를 개최하여 시국대책을 강구할 것을 제의했다. 이에 따라 1941년 4월 20일 하와이 호놀룰루에서 미국내 각 한인단체 대표들이 모여 개최한 해외한족대회의 결의에 따라 같은 해 8월 미주내 모든 단체들을 통합한 재미한족연합위원회가 조직되었다. 미주로스앤젤리스에 설치된 재미한족연합위원회 집행부 위원으로 선임된 그는 대한민국임시정부의 후원과 외교 및 선전사업을 추진했다. 1941년 12월 재미한족연합위원회 집행부가 미국 육군사령부의 허가를 얻어 로스앤젤리스에 캘리포니아주 민병대 소속으로 일명 맹호군인 한인국방경위대를 편성하자, 1942년 2월 자원하여 한인경위대 외교과 정위로 임명되어 매주 군사훈련을 받으며 대일 항전을 준비했다. 또한 같은 해 10월에는 재미한족연합위원회 기획연구부 이사로서 미국정부 전략청의 권유에 따라 『한국과 태평양전쟁』이란 비망록을 발간하여 전략청의 전쟁 수행에 도움을 주는 연구서를 작성하기도 했다. 한편, 1943년 9월 이승만 계열의 동지회가 재미한족연합위원회를 탈퇴하여 1944년 6월 독자적으로 외교위원부를 설치하고 활동을 전개하자 재미한족연합위원회도 별도의 외교사무소를 개설하고 외교사무를 전개했다. 이와 같은 분쟁을 해소하기 위해 대한민국임시정부에서같은 해 11월 새로이 주미외교위원부 위원을 선임하자, 외교위원으로 선출된 그는 조국의 독립을 위한 외교활동을 전개하는 동시에 1944년 1월 북미 대한인국민회 총회장으로 다시 선임되어 민족운동에 진력했다. 1945년 4월 대한민국임시정부로부터, 제2차 세계대전의 전후 평화를 준비하기 위해 개최된 연합국회의에 파견할 대표로 선임되어 활동하는 등 평생을 조국의 독립을 위해 헌신했다. 정부는 1995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