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지회에 참여, 이승만 박사를 후원한 송헌영 목사
송헌영 목사는 1932년 미국 선교사의 도움으로 로스앤젤리스에 도착했다. 이때 이승만 박사와의 첫 만남이 이루어졌고 독립운동에 참여하게 된다. 북미시보의 기자로 생활하면서 교포사회의 독립운동 의식을 고취시켜 나갔다. 그후에는 북미총회관 건물안에 있는 동지회 교회에서 무보수 목사로서 사역을 했다. 송헌영 목사는 3.1만세운동이 벌어졌을 때인 1919년 평양 숭실학교에서 교편을 잡고 있었다. 일제는 그가 만세사건에 가담했다고 군산의 미션스쿨로 좌천을 시켰다. 이때 학교에서 선교사를 만나게 되었고, 더 공부를 하고 싶다는 뜻에 유학 추천서를 써주었다. 미국에 와서는 공부보다는 동지회교회에서 목회를 하면서 이승만 박사의 독립운동을 후원하는 일을 했다. 그리고 여러차례 독립기금을 냈다. 1972년 84세의 나이로 별세했다. 부인 송자희 여사와의 사이에 송영창 등 6남매를 두었다. 맏아들 송영창은 아버지의 뒤를 이어서 대한인동지회 북미총회장이 되어서 이승만 박사의 독립운동을 기리는 사업을 해왔다.
성명 : 송헌영
훈격(연도) : 건국포장(2014)
운동계열 : 미주방면
출생지 : 전라남도 목포
생존기간 : 1887.2.1 ~ 1970
1932년 11월 로스앤젤리스에서 만주사변에 대한 한인사회의 대응을 모색하기 위해 개최된 나성공동회에 참석했다. 1940년 3월 다뉴바에서 개최된 대한인국민회 중가주 지방회 주최 3.1절 기념식에서 민족의 장래에 관한 연설을 했으며, 12월 중가주 지방회 리들리 지역 통신원에 임명되었다. 1941년 3월 리들리에서 열린 3.1절 기념식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했으며, 12월 재미한족연합위원회 임시위원 및 사무과원에 임명되었다. 1944년 2월 대한인동지회 북미총회 부회장으로 활동했다. 9월 동지회 남가주지방회 주최 국치기념식에서 주석으로 활동하고, 11월 재미한족연합위원회 전체대표회에 동지회 북미총회 대표로 참석했다. 1945년 7월 제1회 동지회 미주하와이대회에 참석해 정강 제정위원에 임명되고 동지회의 후신인 대한민주당 규칙기초위원에 임명되었다. 샌프란시스코대회 교섭위원에 임명되고, 여러차례 독립운동 자금을 제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