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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종익

흥사단과 대한인국민회의 큰 지도자 송종익

송종익송종익은 미주 한인사회의 큰 인물이다. 도산 안창호를 도와 흥사단을 창단했고 평생을 흥사단을 위해서 헌신했다. 그리고 대한인국민회의 독립운동에 적극 참여를 한 지도자이다. 1908년 3월 샌프란시스코에서 일어난 첫애국 의열투쟁인 장인환 전명운 의사 후원회 재무를 맡았다. 그리고 일본의 침략 야욕과 한국의 독립의 필요성을 미국 언론에 알리는데 앞장을 섰다. 무엇보다도 미주와 멕시코의 초기 이민사회에서 8,390달러를 모금했고 애국재판을 승리로 이끌었다. 도산 안창호와 송종익 사이는 참으로 특별했다. 도산의 독립운동의 재정 후견인이 되었고, 도산을 대신해서 미주 가족을 위한 보호자 역할을 맡았다. 1913년 5월13일 샌프란시스코에 흥사단을 창단할 때 그는 경상도 대표로 단우가 되었다. 단우번호는 20번. 노총각으로 독립운동에만 나섰던 송종익은 1923년 미국에 유학을 온 평안북도 선천 출신 김영도와 결혼을 했다. 부인과 맏아들 위리, 그리고 딸 메리 등 흥사단을 위한 삶을 살았다. 송종익의 독립운동은 태평양 전쟁을 전후한 시기에 더욱 활발해졌다. 1945년 5월18일 재미한족연합위원회 집행부 재무로 선임되었고, 자주독립국을 건설하기 위해서 한국에 파견하는 대표단의 재무를 맡았다. 송종익은 로스앤젤리스에서 오랫동안 패밀리마켓이라는 식품점을 경영했다. 경제적으로 자립을 했다.1956년 1월7일 뇌일혈로 별세, 로즈데일묘지에 안장되었다. 향년 69세 그리고 1995년 10월 대전 국립묘지로 이장되었다. 아들 송 위리와 딸 송 메리는 아버지의 뜻을 받들어 1만5천달러를 출연, 우강 송종익장학재단을 세웠다. 그리고 1950년대부터 흥사단 한국본부에서 선발한 학생 1명씩을 미국으로 초청, 공부를 시키고는 다시 한국으로 돌아가서 봉사를 하도록 했다.

성명 : 송종익
훈격(연도) : 독립장(1995)
운동계열 : 미주방면
출생지 : 경상북도 대구
생존기간 : 1887. 2.27 ~ 1956. 1. 7

대구 사람이다. 1906년 4월 유학을 목적으로 미국에 와서 샌프란시스코를 중심으로 결성된 민족운동단체인 공립협회에 가입하여 민족운동에 진력했다. 1908년 3월 대한제국 외교고문인 스티븐스가 샌프란시스코에 와서 일제의 한국침략을 정당화하는 발언을 신문지상을 통해 발표하고 대동보국회와 공립협회의 회원인 장인환, 전명운 의사가 스티븐스를 처단하자, 양 의사의 재판후원회를 결성하고 재무로 임명되어 양 의사의 재판 후원 및 후원경비 조달, 변호사 교섭 등을 담당했다. 공판과정을 독립재판으로 전개하는 등 재판과정을 통해 한국인의 독립의지를 구미 각국에 널리 인식시켰다. 1913년 5월 샌프란시스코에서 민족 장래에 동량이 될 인재 양성을 위해 홍언 등 8명의 발기위원과 함께 흥사단을 창단하는 한편, 후일 흥사단 이사부장을 역임했다. 1917년 1월 안창호와 함께 북미실업주식회사를 조직하고 주금 9만 5천 달러를 모집하여 쌀농사를 지어 군자금을 마련하고자 하였으나 실패를 거듭한 끝에 1927년 문을 닫고말았다. 또한 1932년 1월 재차 흥업회사를 조직하여 재원 확보에 노력하였으나 이 또한 실패하고 말았다. 1919년 3월 대한인국민회 재무로 활동하면서 대한민국임시정부 설립에 필요한 자금을 모아 송금하는 한편, 1936년 5월 분열된 북미지역 한인민족 운동단체의 부흥을 위해 소집된 각 지방 대표자회의에 참석한 그는 각 단체를 통합해 북미 대한인국민회를 재조직하는 한편, 미주 한인사회의 부흥과 항일운동, 임시정부의 재정 후원을 했다. 또한 회의 면모를 일신하기 위해 추진된 대한인국민회 총회관 건축위원으로 선정되어 1938년 4월 총회관을 낙성하는데 헌신했다. 1939년 중국의 한인독립운동단체인 광복진선과 민족전선이 하나로 통합되고 중일간의 전쟁이 고조되자, 그를 비롯한 북미 대한인국민회 임원들은 1940년 9월 미주와 하와이 각 단체 대표자들에게 연석회의를 개최하여 시국대책을 강구할 것을 제의했다. 이에따라 1941년 4월 20일 하와이 호놀룰루에서 미국내 각한인단체 대표들이 모여 해외한족대회를 개최하자, 한시대 등과 함께 북미 대한인국민회 대표로 참석한 그는 대회의 선언문과 해외한족대회 결의안을 작성했다.이 결의에 따라 같은 해 8월 미주내 모든 단체들을 통합한 재미한족연합위원회가 조직되고 미주 로스앤젤리스에 재미한족연합위원회 집행부가 설치되자, 집행부 위원으로 선임된 그는 대한민국임시정부의 후원과 외교 및 선전사업을 추진했다. 또한 1941년에는 대한인국민회 부의장, 1943년 재미한족연합위원회 집행부 위원 겸 재무로 선임되어 활동했다. 1943년 9월 이승만 계열의 동지회가 재미한족연합위원회를 탈퇴한 후 1944년 6월 독자적으로 외교위원부를 설치하여 활동하자 재미한족연합위원회도 별도의 외교사무소를 개설하고 외교사무를 전개했다. 이와 같은 사태에 대해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같은 해 8월 외교위원부를 새롭게 개조할 것을 명령하자, 그 해 10월 로스앤젤리스에서 미국과 하와이의 17개 단체 중 동지회 계열의 4개 단체를 제외한 13개 한인단체가 대표회를 개최했다. 이 대회에 대표원으로 참석한 그는 개조된 주미외교위원부 외교위원으로 선출되어 조국의 독립을 위한 외교활동을 전개했다. 1945년 조국이 광복되자, 10월 조국의 재건을 후원할 목적으로 구성된 재미한족 국내파견대표단 재무로 선임되어 고국을 떠나온 지 40여년 만에 조국의 땅을 밟았으나, 당시 해방정국의 혼란으로 인해 별다른 활동을 보이지 못하고 8개월만에 미국으로 왔다. 정부는 1995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송종익M1

흥사단의 중심 인물인 송종익은 김영도와 로스앤젤리스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뒷줄에 도산의 부인 이혜련 여사, 오른쪽에 홍언이 보인다. (1924년 2월)

송종익M2

송종익과 흥사단 단우들이 연차대회 후 로스앤젤리스 카타리나 단소 앞에서 사진을 찍었다. 앞줄 앉은이 오른쪽이 송종익 (1942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