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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가주 한인비행학교 설립100주년 맞았다

노백린 장군과 김종림 애국지사의 꿈

상해 임시정부 노백린 군무총장과 백미대왕(Rice Kang) 김종림이 세운 북가주 한인비행학교가 올해로 설립 100주년을 맞이했다. 1919년 2월20일 북가주 쌀농장지대인 윌로우스에서 한인비행사를 양성하는 학교를 세운지 한세기를 맞이했다. 대한인국민회 기념재단은 역사적인 이날을 기억하는 두가지 사업계획을 세웠다. 그 첫째는 미주독립 운동과 한인비행학교 설립 100주년기념 세미나를 개최하는 것이고, 또 하나는 역사의 현장을 직접 방문해서 비행사 양성의 큰 뜻을 가진 독립운동가의 숨결을 직접 체험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3월부터 시작된 코로나바이러스 비상사태로 100주년 기념행사를 취소하는 안타까움이 있었다. 대한제국에서 육군무관학교장을 지낸 노백린 장군은 해외 독립군 양성을 위해 미국으로 망명했다. 하와이에 1916년에 도착했고, 박용만의 대조선국민 군단에서 별동대 주임으로 학생들을 가르쳤다. 그리고 육군 출신인 그가 비행학교를 세운 것은 미주한인들의 권유 때문이었다. 제1차 세계대전에서 공군의 중요성을 경험한 미주한인들은 독립운동의 하나로 조종사 양성에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북가주 윌로우스에 한인비행학교를 세운 노백린 교장은 일본과 전쟁을 하는 날, 도쿄로 날아가리라는 꿈을 가지고 있었다. 훈련을 시키던 교사 한장호는 “일본 천황궁을 폭파하겠다”고 다짐을 했다고 기록에 남겼다.북가주비행학교의 설립은 상해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무장독립운동지원 계획 중 하나였다. 또다른 하나는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장을 역임한 도산안창호의 관심과 지원이 컸다는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 총무 곽림대는 매달 6백달러씩 비행학교를 지원하기로 결정했고 모금 활동을 폈다. 하지만 독립군 비행사들을 앞세워 도쿄 공습에 나서겠다는 노백린과 김종림의 꿈은 1년만에 좌절되고 말았다. 1차대전 종전으로 곡물사업의 특수가 사라진 데다가 1920년말 캘리포니아주 전역에 대홍수가 일어나 김종림의 쌀농장은 파산위기를 맞았기 때문이다. 비행학교의 운영비 지원이 끊어져 한인비행학교는 1921년 4월 문을 닫았다. 노백린은 상해 임시정부로 돌아가 국무총리 서리를 맡았고, 1926년 1월22일 중국에서 숨을 거두었다. 로스앤젤레스에 사는 노백린 장군의 손녀인 노(이)영덕 권사(동양선교교회)는 “할아버지가 독립군 군복을 입고 남대문으로 서울에 입성하고 싶다.”는 꿈을 이루지 못한 것이 끝내 안타깝다고 말했다. 북가주비행학교 교사인 한장호씨는 101세까지 로스앤젤레스에서 살다가 세상을 떠났고, 비행학교 자료를 남가주대학 동아시아도서관에 기증을 했다. 한인비행학교는 대한민국공군의 뿌리이다. 창군 71주년을 맞이한 공군의 기원으로 오늘 자리 매김을 했다.

노백린 장군(중앙)과 비행학교 학생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