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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준호

사회주의 운동을 통해 항일운동을 한 변준호

변준호변준호는 진보주의 언론인이자 사회혁명주의자로 미주에서 항일운동을 벌였다. 1917년 중국 남경을 거쳐 미국으로 유학을 왔다. 1920년대 일리노이 웨슬리안대학에서 농업을 전공했다. 1930년 10월 18일 시카고에 살던 변준호는 진보적인 한인학생과 청년들과 함께 사회주의 사상단체인 사회과학연구소를 만들었다. 발기인 취지서에서 “우리는 세계무산계급의 부르짖음에 보조를 같이해 약소민족의 설음을 위해 투쟁전선에 나갈 것이다.”라고 밝히고 있다. 변준호는 처음부터 재무위원을 맡았다. 한인사회의 보수단체로 부터 강력한 비판과 탄압을 받았고, 변준호는 국민회에서 퇴출이 되었다. 1920년 시카고에서 흥사단에 입단했다. 단우번호는 102번. 하지만 사회과학연구회 활동을 신한민보에 집중적으로 보도하여 흥사단에서 제적되었다. 1937년말 중국의 김원봉과 조선의용군 활동이 미주에서 알려졌을 때 뉴욕과 로스앤젤리스후원회에 가입하여 일화배척, 군수품 일본 수출반대 강연회, 모금활동, 시위등을 진두지휘했다. 미주에서 좌익세력으로 알려진 김강과 이경선 등과 함께 미주에서 사회주의 운동을 펴나갔다. 변준호는 1966년 2월 20일 별세했다. 부인 박마리아 사이에 아들 홍철을 두었다.

성명 : 변준호
훈격(연도) : 애국장(1997)
운동계열 : 미주방면
출생지 : 경기도 양평
생존기간 : 1895.12. 1 ~ 1966. 2.20

경기도 양평 사람이다. 미주지역에서 조선의용대후원회와 대한민국 임시정부 워싱턴외무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하면서 독립운동을 전개했다. 1917년 중국 남경을 거쳐 캘리포니아로 왔다. 그후 1930년 사회과학연구회를 결성했다. 이러한 사회과학연구회에는 급진적인 한인 유학생과 청년들이 다수 참가하였으나 미국 정부 당국의 단속으로 해체되고 말았다. 1937년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중국인들의 대일항전을 조국독립운동의 방도로 인식하고, 중국후원회를 조직하는데 앞장 섰다. 그는 뉴욕에서, 강영승은 시카고에서, 김강은 로스앤젤리스에서 각각 중국후원회를 조직하여 중국인의 항일활동을 지원했다. 1938년 중국에서 조선의용대가 결성되자, 미주에서도 이를 후원하기 위한 움직임이 일어나 1939년 4월 의용대후원회가 뉴욕에서 결성된 것을 시작으로 로스앤젤리스, 시카고 등 미주 본토와 하와이, 큐바, 멕시코 등에 지부가 설치되었다. 이때 그는 뉴욕의 한인들을 중심으로 조선의용대후원회를 결성했다. 이들은 배일선전과 군사후원금 모집을 위한 각종 대중집회와 기념대회를 개최하면서 활발하게 활동을 전개했다. 1940년 5월에는 대내외 공작의 통일을 위해 조선의용대 후원회연합회를 발족했다. 1941년 4월 하와이 호놀룰루에서 개최된 해외한족대회에 조선의용대 미주후원회연합회 대표로 참가하여 미주지역 독립운동단체 연합에 힘을 쏟으며 독립운동에 매진했다. 그후 중국후원회를 조선의용대 후원회로 개편했으며, 1942년에는 민족혁명당 미주총지부로 개편하여 미주 총지부 위원장직을 맡아 운영했다. 그리고 1943년 9월 기관지인 「독립」의 출판을 위한 발기인으로 참여했고 동지에 조선민족혁명당과 우리의 해방운동이라는 글을 기고하여 독립의식을 고취하는 활동을 전개했다. 1944년 임시정부 워싱턴 외무위원회 위원 겸 상항대표단 단원으로 활동했다. 1945년 초 본격화된 OSS의 한반도 침투작전, 즉 냅코작전에도 참가했다. 정부는 1997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왼쪽부터 최능익, 변준호, 신두식, 미상 등이 롱비치항에서 일본 에 고철 수출을 반대하는 데모를 하고 있다. (1939년, USC 소장)

왼쪽부터 최능익, 변준호, 신두식, 미상 등이 롱비치항에서 일본에 고철 수출을 반대하는 데모를 하고 있다. (1939년, USC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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