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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일규

대한인국민회 2인자로 독립운동을 지휘한 백일규

백일규백일규는 대한인국민회의 제2인자였다. 도산 안창호가 상해로 떠나자, 미국, 하와이, 멕시코 3지역의 독립운동을 지휘했다. 미국 대통령, 국무장관 대리, 프랑스, 영국, 이태리 수상 등에 한국의 독립을 위한 호소편지를 계속해서 썼다. 일화배척, 한인 인구등록 등 대한인국민회의 갈 길을 제시했고, 미주에서 독립운동과 임시정부 지원 자금 8만여달러를 모집한 일에 있어서도 세운 공이 참으로 컸다. 백일규은 1880년 3월11일 평안남도 강서 증산에서 출생했다. 고향에서 한학을 공부한 뒤 평양에서 소학교와 중학교를 다녔다. 서울에 와서는 관립대학 1학년을 공부했다. 1894년 전라북도 고부 전봉준이 주동하던 동학혁명에 가담하여 반외세 반봉건 투쟁을 했다. 더 큰 세상을 그리며 1905년 하와이사탕수수농장에 노동자로 이민길에 올랐다. 1년동안 노동을 하면서 친목회 회원이 되어 하와이지역 동포간의 친목 증진에 힘썼다. 친목회는 뒤에 상부상조와 정치활동을 하는 각종 조직의 기초가 되었다. 백일규는 1913년 헤이스팅스고등학교를 마치고 네브라스카대학교에 입학하여 공부하다가 1914년 대한인국민회 북미총회 기관지 신한민보 주필이 되어 샌프란시스코로 이주한 뒤에도 소년병학교 운영에 계속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백일규는 한학에 뛰어날 뿐만 아니라 미국 명문대학인 캘리포니아대학교 버클리에서 경제학을 공부하여 학사학위까지 획득한 지성을 갖춘 언론인으로 살았다. 독실한 크리스천으로서 그리고 흥사단 단우로서 정직하고 성실하게 주위의 존경을 받았다. 흥사단에 입단한 것은 1914년 8월15일이었다. 단우번호는 52번. 1920년에는 「한국경제사」를 저술 간행하여 교포자제들의 민족교육 교재로 활용하도록 했다. 그중에서도 1925년 11월17일 대한인국민회 북미총회장으로 선출된 후 1934년까지 9년을 연임했다. 1934년 1월부터 2년간은 임시정부 샌프란시스코 제3행서 재무위원으로 군자금을 모금하여 임시정부에 보냈다. 부인 박씨와의 사이에 아들 승작이 있다. 하와이대학교 서대숙 교수는 백일규의 자서전을 영문으로 번역했다. 1962년 5월31일 별세했다. 로즈데일 묘지에 안장되어 있던 유해는 2002년 9월 대전 국립묘지로 이장됐다.

성명 : 백일규 (Earl Ku Park)
훈격(연도) : 독립장(1997)
운동계열 : 미주방면
출생지 : 평안남도 증산
생존기간 : 1880. 3.11 ~ 1962. 5.31

평안남도 강서 사람이다. 1907년 이래 미주 지역에서 대한인국민회 등 한인사회단체 지도자로 활약하면서 독립운동을 전개했다. 그는 1907년 3월 샌프란시스코에서 장인환, 이병호, 문양목 등과 함께 대동보국회를 조직했다. 미주 한인사회의 단결과 민중계몽을 목적한 단체로 「대동공보」를 발행하는 한편 지방지회를 조직하면서 한인사회의 민족운동에 앞장섰다. 그는 1908년 1월 대동보국회의 회장 겸「대동공보」의 주필로 활동했다. 그리고 1908년 3월 장인환, 전명운 등이 일본 제국주의자들의 한국 침략을 찬양하는 미국인 스티븐스를 사살하는 의거로 미국법정에 서게 되자, 그는 공립협회와 합동으로 후원회를 조직하고 회장을 맡아 후원비를 모아 이들의사를 지원하는 구제활동을 활발히 전개하였다. 1909년 6월 박용만이 네브라스카에 독립군간부를 육성하기위한 한인소년병학교를 설립할 때, 이에 참가 독립운동의 동량을 길러내는데 힘썼다. 그는 1910년 5월 대동보국회가 대한인국민회에 합류하게 되자, 1912년 대한인국민회 부회장에 선출되어 활약하는 한편 네브라스카주립대학에서 학업을 닦기도 했다. 또한 대한인국민회로의 합동과 더불어 기존의 「공립신보」와 「대동공보」도 병합하여「신한민보」로개편되었다. 그는 1914년 7월부터 「신한민보」주필 및 편집을 담당하며 항일언론을 주관했다. 1차세계대전의 종결과 더불어 변화되는 국제정세에 대응하고자 1918년 대한인국민회가 파리강화회의와 뉴욕에서 열리는 소약속국동맹회의에 대표를 파견하기로 결정하자 필요한 자금 모집에 적극적으로 활동했다. 1919년 4월에는 도산 안창호가 임시정부에 참가하기 위하여 중국 상해로 떠나자, 그 뒤를 이어 대한인국민회 중앙총 회장에 취임하여 미주본토·하와이·멕시코 등지 한인들의 독립운동을 지도해 갔다. 1919년 9월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지원하기 위해 30만달러의 애국금을 모집할 계획을 세우고, 애국금 수합을 위한 선전물을 미주한인사회에 배포하는 등 군자금 모집에 힘을 쏟았다. 한편 1918년 캘리포니아대학 경제과를 졸업한 그는 한국경제에 깊은 연구를 진행하여 1920년 「한국경제사」라는 책을 간행했다. 박용만의 군인수지, 이승만의 독립정신과 더불어 미주 한인학교의 교재로 사용되었다. 또한 1926년부터 1933년까지 8년여 동안 북미 대한인국민회 총회장으로 활동하면서 지방 조직을 확대하며 미주지역 한인사회의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1934년 1월부터 1936년까지 임시정부의 샌프란시스코 재무위원을 맡아 한인들을 대상으로 인구세와 애국의연금 등 군자금을 모집하여 어려운 상황에 처해 있던 임시정부의 활동을 지원했다. 1939년에는 미주지역 한인들 가운데 진보적 인사들을 중심으로 조직된 조선의용대후원회의 주도적 역할을 수행하였으며, 1943년 조선민족혁명당 지지세력들이 주도하여 창간한 신문「독립」의 발기인으로 참가했고, 1945년 6월 「독립」의 사장 겸 총무로 활동했다. 광복 후 그는 1946년부터 2년 동안 하와이에서「국민보」의 주필로 활동했다. 정부는 1997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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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일규가 펴낸 한국경제사 (192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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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일규와 부인 박씨 그리고 자녀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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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즈데일에 있던 백일규 묘지, 지금은 대전 국립묘지로 이장되었다. (200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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