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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사겸

독립운동과 사업을 평생일기로 남긴 방사겸

방사겸 방사겸은 1881년 평양에서 태어났다. 23살의 나이인 1903년 하와이 노동이민길에 올랐다. 사탕수수농장에서
고된 노동으로는 희망이 없다고 생각하고는 공부를 하기 위해 샌프란시스코로 이주했다. 그때에 기숙사를 찾아 온 도산 안창호를 처음 만났다. 그리고 독립운동에 나서기로 결심을 했다. 1905년 장경과 함께 대동교육회를 창립하고 구국운동에 나섰다. 그는 인삼장사로 어느 정도 돈을 모은 뒤 시카고로 가서 공부를 시작했다. 이에 앞서 1916년 사진신부살로매 이 양과 샌프란시스코에서 결혼, 가정을 꾸렸다.에빙햄 미술학교에 입학해서 공부를 마치고는 시카고에서 살았다. 방사겸은 장경과 남양군도와 호주로 인삼장사에 나서고 멀리 큐바까지 다녀오기도 했다. 미조리에서 찹수이 홀세일사업으로 성공하고 이승만의 독립운동을 후원했다. 그후 중국식 식당을 운영하면서 10남매 교육에도 열심이었다. 방사겸은 1950년 세인트 루이스에서 로스앤젤리스로 이주했다. 후원해 오던 이승만 박사가 대통령이 된 것을 보고는 누구보다도 기뻐했고 한국에 까지 다녀왔다. 그후에는 정치를 잘못하고 있다면서 상심에 빠지기도 했다. 방사겸은 작고 3년전에 평생일기를 쓰기 시작했고, 노트7권에다 썼다. 독립기념관은 2006년 방사겸의 평생일기를 한국독립운동사 자료 총서 제21집으로 발간했다. 저자는 1977년 8월30일 방사겸의 부인 살로매 방 여사를 인터뷰했다.“40년간 남편은 미국에서 장사길에 나섰다. 돈을 벌어서는 독립운동을 위해 내는 것을 보람으로 느꼈다.”고 말을 했다. 그리고 방사겸이 노트 7권에 쓴 평생동안 쓴 일기를 빌려주었다. 방사겸은 10남매를 낳아서 모두 교육을 잘 시켰다. 셋째 아들 Young Bahng은 패사데나에 거주하고 있다. 1955년 12월8일 로스앤젤리스에서 세상을 떠났고, 로즈데일묘지에 안장되어 있다.

성명 : 방사겸 (Samuel Bahng)
훈격(연도) : 건국포장(2011)
운동계열 : 미주방면
출생지 : 평안남도 평양
생존기간 : 1881. 7. 25 ~ 1955. 12. 8

23세 때인 1904년 하와이로 이민을 왔다. 1905년 12월 캘리포니아주에서 장경이 결성한 대동교육회에 참여했다. 회원모집을 위한 순찰위원으로 각지를 순행하면서 미주 한인들의 교육 진흥을 위해 노력했다. 대동교육회는 1907년 정치적 운동을 목적으로 하는 대동보국회로 조직을 확대 발전시켰다. 이때 그는 새크라멘토에서 회원을 확보하고 지방회를 설립하였으며, 프레즈노와 솔트레이크시티에서는 대동보국회 경찰소를 설치하는 등의 활동을 전개했다. 한편, 1908년 3월 장인환,전명운 두의사가 친일외교관 미국인 스티븐스를 처단하는 거사를 일으켰다. 이 사건을 계기로 미주의 대표적인 단체인 공립협회와 방사겸이 관여하고 있는 대동보국회가 합동해야만 한다는 의견이 일어났다. 이때 방사겸은 양 의사의 대사건을 순로조이 치러 나가자면 두 회가 합하는 것이 옳다고하면서 두 단체의 합동을 적극 찬성했다. 1909년 2월 공립협회는 하와이의 합성협회와 합동하여 국민회가 되었고, 1910년 국민회는 대동보국회와 합동하여 대한인국민회가 결성되었다. 그후 시카고 등지에서 1923년한국독립연구회를 창립하여 간사로 활동했고, 1931년과 1944년 이후로 신한민보와 북미시보에 여러 차례 사설을 게재하여 재미한인들에게 민족의식을 고취했다. 그는 세상을 떠나기 3년전 자신의 생애를 정리하여 순한글로 적은 평생일기 7권을 남겼다. 평생일기에는 한국인의 미주 이민과 독립운동에 대해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정부는 2011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방사겸이 평생 쓴 일기를 한국 독립 기념관이 책으로 펴냈다. (2006년 9월)

방사겸이 평생 쓴 일기를 한국 독립
기념관이 책으로 펴냈다. (200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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