넵코작전 참가, 자유한인보 발간한 박형무
성명 : 박형무
훈격(연도) : 건국포장(2008)
운동계열 : 미주방면
출생지 : 충청남도 대전
생존기간 : 1922. 5. 5 ~ 1982. 10. 2
일제 말기 일본군에 학병으로 강제 동원되어 미얀마에 파견되었다. 1945년 3월 미얀마의 구메(Kume)지역에서 일본군 기마대를 탈출하여 영국군에 투항했다. 연합군에 인도된 박형무는 그보다 1주일 먼저 탈출한 박순동, 이종실 등과 인도의 뉴델리에 있는 미군에게 인도되었다. 이들 3인은 뉴델리에서 비행기를 타고 에집트 카이로를 거쳐 미국의 워싱턴에 도착했다. 박형무를 비롯한 3인은 다시 워싱턴을 출발하여 카탈리나섬에 도착했다. 냅코작전의 훈련은 남가주의 산타 카탈리나섬에서 이루어졌다. 박형무를 비롯한 교육생들은 무기, 비무장전투법, 지도읽기, 파괴, 무전, 촬영, 낙하산훈련, 선전 등에 대하여 훈련을 받았다. 박형무는 친일외교관 스티븐스를 처단한 전명운 의사의 사위인 이태모 교관의 지휘하에 각종 첩보훈련을 받게 되었다. 그가 받은 훈련은 주로적 진지를 잠입하기 위한 특수 훈련이었고, 교관 이태모는 매분당 20단어를 수신하고 분당 25단어를 송신할 수 있는 무선기술을 가르쳐 주었다. 1945년 8월 일제가 무조건 항복함에 따라 국내 침투 훈련이 중단되고 박형무등 교육생들은 하와이의 포로수용소로 옮겨졌다. 이곳에서 박순동, 이종실 등 학병 출신자들과 함께 박형무는 자유한인보라는 잡지를 만들어 서로 돌려보았다. 자유한인보는 제7호까지 발간되었는데, 60쪽 정도의 주간행물로 미국사회생활 소개, 독자들의 투고, 그리고 한국에 관한 소식을 게재하여 2명 앞에 1권씩 배포했다. 자유한인보 제7호 정간의 말에 의하면, 주보를 발간한 목적은 “우리들의 단결을 촉진하고 그 단결의 기관지가되자는 것”이라고 했다. 정부는 2008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