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딴사스에서 사업 성공 후 국민회에 열심 박창운
박창운은 외교방면에 탁월한 능력을 가졌다. 1923년 3.1절 4주년 기념식 후 가두행진을 주도했다. 이 해 12월2일에는 대한인국민회 까르데나스 지방회 회장을 지냈다. 이에 앞서 그는 1921년 6월14일 한인 60여명이 모여서 대한인국민회 큐바지방회를 창립했다. 그는 큐바로 이주한 뒤 어저귀회사에서 일을 구하여 한인들이 함께 일을 할 수 있도록 했다. 그리고 주무원으로 농장에서 말을 타고 다니면서 동포들에게 일을 시키고 규정을 지시했다. 임금을 주는 날이면 전체 임금을 받아 일한 시간에 따라 전달했다. 점포 여러개를 운영하면서 돈을 많이 벌었다. 두 아들과 딸과 함께 안경점과 보석상을 운영했다. 마딴사스의 부호로 기록될 정도였다. 1962년 큐바혁명 때 부르조아 계급으로 큐바를 떠날 수 밖에 없었다. 박창운은 75세, 부인 현미숙은 65세에 큐바를떠나 하와이를 거쳐 로스앤젤리스로 왔다.
성명 : 박창운
훈격(연도) : 애족장(2011)
운동계열 : 미주방면
출생지 : 서울
생존기간 : 1889. 1. 21 ~ 미상
1907년 대동보국회 발기인으로 활약했다. 1916년 대한인국민회 멕시코 메리다 지방회 외교위원으로 활동한데이어, 1921년부터 1945년에 이르기까지 대한인국민회 큐바 마딴사스 지방회에서 지속적으로 활동했다. 특히 민성국어학교 교비 마련에 진력을 다했다. 1924년 6월과 1929년 8월, 1930년 1월, 1931년 2월에는 대한인국민회 큐바 마딴사스 지방회 회장으로, 1941년에는 하와이에서 조직된 재미한족연합위원회 집행부 미주지방위원으로 활동하면서 모두 78.78달러를 독립금으로 지원했다. 정부는 2011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큐바 마딴사스 초기 한인사회에서 성공한 박창운 가족, 부인 현미숙과 2남1녀를 두었다. (1930년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