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주에서 군인양성으로 독립운동을 한 박용만
박용만은 군사훈련을 통해 조국의 독립을 쟁취하려던 무장투쟁론을 주도한 독립운동가이다. 1904년 상동교회 전덕기 전도사와 미국 선교사의 도움으로 미국 유학길에 올랐고, 1905년 2월6일 샌프란시스코에 도착을 했다. 네브라스카주 링컨고등학교를 졸업하고 헤이스팅스대학 정치과를 졸업한 후 한인소년병학교를 세웠다. 문명부강을 위한 필수조건으로 모든 국민들의 납세와 병역의무를 주장하는 국민개병론을 1911년에 간행했다. 그는 민족의식이 강한 지원자들로 한인수비대를 조직해야된다고 믿었고 그 목적으로 소년병학교를 세운 것이다. 1912년 6월에 다시 하와이로 옮겼고 오아후섬 산너머에 국민군단을 창설했다. 하와이국민군단은 2년간 계속되었다. 운영기금으로 7만8천달러를 썼고, 이를 본 외교독립론을 주장한 이승만과 갈등이 시작되었다. 1918년 1차 세계대전 후 박용만은 대한독립선언서에 서명하고 미국보다 한국인이 다수 거주하고 지리적으로국내와 가까운 원동으로 가서 다시 무장투쟁을 전개하기로 방향을 바꾸었다. 1919년 5월 하와이를 떠나 6월 북경에 도착. 상해 임시정부는 그를 외무총장에 임명했으나 취임하지 않았다. 임정의 외교적인 투쟁에 찬성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1925년 7월8일 다시 호놀룰루를 방문했다가 중국으로 돌아 갔다. 중국인으로 변장하고 한국에도 입국한 적도 있다. 박용만은 중국 한인사회와 독립운동계에 일본의 밀정으로 잘못 알려져 1928년 7월17일 의열단원인 이해병에 의해 피살되었다. 이승만과 안창호 등과 미국에서 독립운동에 불을 집힌 진보적인 박용만은 독립의 날을 보지 못한채 비운의 삶을 마쳤다.
성명 : 박용만
훈격(연도) : 대통령장(1995)
운동계열 : 미주방면
출생지 : 강원도 철원
생존기간 : 1881.07.02(윤) ~ 1928.10.17
루를 방문했다가 중국으로 돌아 갔다. 중국인으로 변장하고 한국에도 입국한 적도 있다. 박용만은 중국 한인 사회와 독립운동계에 일본의 밀정으로 잘못 알려져 1928년 7월17일 의열단원인 이해병에 의해 피살되었다. 이승만과 안창호 등과 미국에서 독립운동에 불을 집힌 진보적인 박용만은 독립의 날을 보지 못한채 비운의 삶을 마쳤다. 강원도 철원 사람이다. 숙부인 박희병 슬하에서 성장한 그는 서울에서 관립 외국어학교의 일본어과를 나왔고, 1895년경 일본유학시험에 합격, 도일하여 일본에서 중학교를 졸업했다. 경응의숙에서 2년간 정치학을 공부했으며, 숙부의 소개로 박영효 등 개화파 인사들과 교분을 갖게 되면서 활빈당에 가입하여 활동했다. 그 후 안국선, 오인영 등과 함께 귀국, 이른바 활빈당사건으로 피체되어 옥고를 치르던 중 숙부와 선교사들의 도움으로 수개월만에 석방되었다. 출옥 후 독립협회, 만민공동회, 보안회에서 활동하면서 계몽운동을 벌이던 중 1904년 7월 일제의 황무지개척권 반대 투쟁을 전개하다가 투옥되어 제2차 옥살이를 하게 되었다. 이 때 옥중에서 정순만, 이승만과 만나 결의형제를 맺으면서 이른바 삼만으로 불리게 되었다. 출옥 후 숙부가 있는 평안남도 순천에서 사립학교 교원으로 재직하면서 국어 · 일어 · 산술 · 중국고전 등을 가르치던 중, 그 곳에서 후일 미국내에서 군사활동을 함께 하게 되는 정한경, 유일한 등을 만났다. 그러나 한일의정서, 러일전쟁 등으로 이미 한국이 망국사태임을 간파한 그는 해외로 나가 한국인이 다수 거주하는 지역에서 독립군을 양성하여 무력항쟁을 통한 국권회복을 꾀하기 위해 1905년 해외망명의 길을 택하게 되었다. 1905년 2월 이승만의 아들 태선, 정순만의 아들 양필과 함께 도미길에 올랐다. 도미 후 1906년경 숙부 박장현과 함께 미주 중서부지역인 네브라스카주 커니시에 유일한, 정한경, 정양필을 그리고 이종희, 이희경, 김용대를 링컨시의 학교에, 김병희, 권종호, 정영기, 조진찬 등을 링컨시에 취역시켰다. 이러한 그의 계획은 이후 1910년대 한인 유학생의 절대 다수가 네브라스카주에 집중되었던 하나의 계기를 마련하여 1911년 당시 미국내 한인 대학생의 80%가 네브라스카주 주변에 집중되었다. 1907년 숙부와 함께 콜로라도주 덴버로 옮긴 그는 콜로라도 예비학교에 입학하는 한편 한인 동포들을 위해 여관과 직업주선소를 운영했다. 1908년 1월에는 덴버 근처의 한인 유지들과 논의하여 해외동포대표회의를 소집할 것을 결정하였다. 이에 따라 같은 해 5월 박처후, 임동식, 정한경 등과 함께 해외 한인단체의 통일기관을 조직한 후 이를 바탕으로 무관학교를 설립하고 독립군을 양성한 뒤, 독립전쟁을 전개하여 국권을 회복할 것을 의논하였다. 또한 이들과 함께 무장투쟁의 원동력인 한인청년들의 군사양성기관을 설립하기로 협의하고 이를 대표자회의에 붙일 것을 결정했다. 이러한 노력 끝에 1908년 7월 북미대한인애국동지대표자회의를 개최하여한인군사학교, 설립안을 제출, 통과시킨 그는 1908년 12월 네브라스카 주정부의 허락을 얻어 1909년 6월 미국내 최초의 한인군사학교인 한인소년병학교를 설립했다. 또한 1910년 4월 네브라스카대학과 교섭 끝에 그 학교의 건물 한 동을 임대하고 전장을 마련하여 본격적인 군사훈련을 실시했다. 이와 같이 군사학교 운영에 주력하던 즈음 대한인국민회로부터 「신한민보」 주필로 초빙되자, 1911년 2월 초 취임하였다. 취임 후 그는 대한인국민회를 해외 한인의 통일기관인 임시정부로 조직하고자 노력했다. 그리하여 3월 조선민족의 기회가 오늘이냐 내일이냐라는 논설을 발표하여 해외 한인을 통일하고 결속시키기 위해서는 먼저 헌법을 제정하고 정치적으로 여기에 복종시켜 무형국가 또는 가정부로 변신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주장한 것을 비롯하여 석달에 걸쳐 임시정부 조직론인 무형국가론을 줄기차게 주장했다. 이러한 노력의 결과, 1911년 3월 대한인국민회 헌법 개정안 기초위원으로 선정된 그는 결성선포문을 기초하여 1912년 11월 해외 한인의 최고통일기관인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를 탄생시켰다. 1911년 11월 초 주필 자리를 내놓고 네브라스카대학으로 돌아가 정치학 학사학위를 획득한 그는 이듬해인 1912년 11월 중앙총회 제1차 대표회의에 참석했다가 『신한국보』 주필로 초빙되어 하와이를향해 떠났다. 또한 이 시기 그는 『국민개병설』과 『군인수지』라는 무장항쟁론에 관한 저서를 간행하여 그의 관심을 일반에 널리 확산시키고자 노력했다. 1912년 12월 하와이에 도착한 그는 북미대륙에 있을 당시 그가 주장하던 의무금제도와 자치제도를 하와이에서도 실현시키기 위해 하와이 동포들의 협조로 의무금제도를 확립시켰으며, 같은 해 5월에는 하와이 정부로부터 특별경찰권을 승인받아 하와이 각 섬에 대한인국민회 경찰부장을 설치하여 한인자치제를 확립하고 해외 한인을 일제의 지배하에 두려는 일본정부의 간섭을 배제하여 망명정부로서의 역할을 수행하기도 했다. 또한 국민개병을 통한 국권회복을 실현하기 위해 1914년 6월 미국군대를 모방한 근대적 군사조직인 대조선국민군단을 창설했다. 둔병제식 훈련제도를 도입하여 독립군을 양성하기 위한 전담부대로 성장시켰다. 그러나 1913년 2월 그의 초청으로 하와이에 도착하여 한인들의 교육과 출판사업을 맡은 이승만이 하와이 한인사회의 주도권을 장악하기 위해 1915년 국민회 하와이 지방총회를 장악하고 박용만 계열의 대의원을 구타하는 등 그에 대한 음해공작과 테러행위를 자행했다. 이 일을 계기로 그가 하와이 정부로부터 승인받은 특별경찰권은 취소당하여 하와이 한인사회의 자치권은 상실되었다. 대조선국민군단도 1916년 농장주의 압력으로 계약을 취소당해 문을 닫게 되는 등 이후 하와이 한인사회는 분열로 치달았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도 그는 대한인국민회중앙총회 부회장으로 당선될 정도로 지지를 얻고 있었다. 1915년 6월 중앙총회 부회장 취임차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한 그는 1916년 이승만이 그를 「국민보」 주필로 재임명한다는 소식을 듣고 하와이 한인사회의 통합을 위해 이 제안을 받아들였다. 그리하여 그는 1917년 뉴욕에서 열린 약소국동맹회의에 한국 대표로 파견되기도했다. 또한 1917년 대동단결선언에 참여하여 임시정부 수립의 기초를 닦는데 기여했다. 그러나 1918년 2월 이승만은, 그가 미국영토 내에 국민군단을 설립하여 일본군함인 출운호가 호놀룰루에 도착하면 파괴하려 한다면서, 미·일 관계를 악화시키고 국제평화를 저해하는 음모행위이므로 미국 내에서 그의 군사활동을 금지시키라고 요청하는 등 정치적 음해공작을 또 다시 감행했다. 이로 인해 그는 미국당국으로부터 스파이로 몰려 법정에까지 서야 하는 수모를 겪었다. 본격적인 무장투쟁 준비에 나선 그는 1919년 대한독립선언서를 번역하여 호놀룰루의 「Pacific Commercial Advertiser」지에 보내는 한편, 3월 하와이 호놀룰루에서 국내 및 중국 등지의 독립군단과 통일을 꾀하기 위한 통일군사정부인 대조선독립단 하와이지부를 창설했다. 이와 함께 같은 해 4월 한성임시정부와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외무총장에 피선된 그는 그해 5월 연해주에 도착하여 이민복, 조성환, 백준 등 간도·길림지방의 독립군들과 더불어 대한국민군을 조직하고 총참모로 취임했다. 문창범, 유동열, 신채호 등과 회합하여 노령, 만주지역의 민족주의자를 중심으로 한 독립군 조직에 혼신의 힘을 기울이는 한편, 같은 해 1920년 여름 모스크바로 가서 상해 임시정부 외무총장의 이름으로 소련의 노농정부와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상호 연합하여 노농정부는 임시정부의 독립군 양성 승인과 무기를 공급하고 대한민국임시정부는 공산주의를 선전하고 노농정부의 지휘를 받는 것을 내용으로 하는 밀약을 체결하였다고 한다. 그후 이 밀약의 일환으로 중국, 러시아, 조선 연합선전부가 결성되자, 화아선 연합선전부 부부장의 직위를 맡은 그는 1920년 12월 초 특사를 니콜리스크에 파견, 안정근, 왕삼덕과 회견하여 연합선전부 간도지부를 설립키로 협의케 했다. 그 결과 선전지부 집행군무사령관에 홍범도를 임명하고 사령부를 돈화현에 두어 간도주재 일본군경을 습격하기도 했다. 이후 그는 만주의 군사단체들이 통일된 지도체가 없고, 상해 임정 역시 세력이 약해진 관계로 이들을 지도할 역량이 부재하다는 판단 아래 1921년 4월 신채호, 신숙 등과 북경 근방에서 군사통일주비회를 개최했다. 이 회의에서 노령의 통일된 독립군부대는 후일 국내진공작전을 준비하고 만주의 부대들은 지휘계통을 통일하여 국경일대에서 유격전을 벌이는 진공작전을 감행할 것을 결의했다 한다. 그는 독립군 기지 개척을 위한 자금 마련과 기지 확보를 위해 흥화은행을 설립하고 이 은행의 신용을 담보로 북경과 만주 방면의 토지를 구입하여 각지에 산재한 군인들을 집결 · 훈련시켜 군사단체를 통일하고 독립전쟁을 일으킬 것을 계획했다. 이에 따라 1925년 하와이로가서 군자금을 모금하는 한편 1926년 6월 중국 북경으로 돌아왔다. 독립군 기지 개척을 위해 북경 근방의 땅을 구매하여 대륙농간공사를 설립하고 수전과 정미소를 경영했다. 1928년 10월 17일 북경에서 활동을 계속하던 중 피살되었다. 정부는 1995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