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군으로 한반도 침투작전에 참가 박기벽
박기벽은 1943년 미군에 입대, 한반도 침투작전계획(OSS)에 참가한 후 중가주 독립운동의 땅 리들리에서 50여년을 산 이민역사의 증언자이다. 1939년 유학으로 미국에 왔다. 평안남도 강서에서 태어났고, 배재학당을 거쳐 연희전문에서 공부를 했다. 일제치하의 한국을 떠나 더 넓은 땅, 꿈을 맘껏 펴보기 위해서 미국행 배에 올랐다. 박기벽은 영주권이 없다는 이유로 샌프란시스코 이민국에서 입국이 불허되었을 때 대한인국민회의 보증으로 배에서 내릴 수가 있었다. 2년후 1941년 미국정부의 징병통지서를 받고 입대, 정보국에 배치가 되었다. 해외근무로 로마와 인도, 중국 등지에서 정보를 담당했다. 재대 후에는 LA에서 고등학교, 그리고 UC데이비스에서 조경을 공부한 후 리들리 김브라더스회사에 취직했다. 리들리는 1910년부터 1950년까지 초기 이민노동자들이 젊음을 불사르던 미주 독립운동의 역사의 현장이다. 차별받던 농장일꾼으로 이곳에서 한많은 세월을 보낸 한인들은 상해 임시정부를 위해서 독립금을 냈고, 대한인국민회의 의무금을 내는데 주저하지 않았다. 박기벽은 30여년을 김브라더스회사의 원예 책임자로 일하고 은퇴를 했다. 미국에 도착한 후 대한인국민회 회원으로 나라사랑의 마음을 다졌다. 1999년 5월20일 84세의 나이로 별세했다. 피아니스트인 딸 실비아 박은 하바드법대를 나와 변호사가 되었고, 아들 잔 박은 옥스나드해안 경비대에 근무했다. 1983년 8월31일 저자와 인터뷰에서 박기벽은 “농장에서 일하는 노총각들이 독립금을 보내며 향수를 달랬다”면서 눈시울을 적셨다.
성명 : 박기벽
훈격(연도) : 애족장(1998)
운동계열 : 미주방면
출생지 : 평안남도 강서
생존기간 : 1915 ~ 1999. 6.2
평남 강서 사람이다. 1943년 미 육군 정보하사관으로 근무하면서 첩보활동을 통해 한국독립운동에 참가했다. 미주에서 생활하던 2차 세계대전의 막바지인 1943년 3월 미군 육군에 입대했다. 미군에 입대한 것은 독립운동에 투신하기 위해서였다. 그리하여 그는 미군 정보하사관의 훈련을 마친 뒤 주로 중국·인도·미얀마 지역의 적정 수집 등에 종사했다. 그후 그는 OSS(Office of Strategic Services)가 주도한 ‘냅코작전(NAPKO Project)’에 참가했다. 냅코작전은 한국내에 당장 침투하여 첩보, 지하조직 조성 등의 활동을 했고 사보타지와 무저항운동으로 이어갈 것을 목적으로 한 미군의 국내 침투작전이었다. 이는 2,300만 한국 국민이 적극적으로 독립운동을 지지한다는 것을 전세계에 알리는 효과를 기대한 것이었다. 이를위해 무기조작법, 비무장 전투법, 지도 읽기, 파괴, 무전, 촬영, 낙하산 훈련, 비밀 먹 사용법, 선전, 일본인의 특성등에 관한 특수훈련을 받게 되었다. 이들 훈련이 끝나면 각각 5∼10명의 공작조로 나뉘어 서울, 평양, 평남의 농촌지역 등 국내 각지에 침투하여 독립운동을 전개할 계획이었다. 그는 1945년 3월부터 미국 남가주 카타리나섬에서 국내침투를 위한 특수훈련을 받던 중 광복을 맞이했다. 정부는 1998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수여하였다.

리들리에 사는 박기벽과 사진결혼 신부 정현석씨가 농장에서 함께 사진을 찍었다. (1983년 8월31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