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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강)원신

대한여자애국단 통해 독립기금 모은 박(강)원신

박(강)원신박(강)원신은 1904년 평양에서 강영승과 결혼, 1905년 5월29일 남편 가족과 함께 하와이로 노동이민길에 올랐다. 다시 남편과 시누이 강혜원과 중가주 다뉴바로 이주했고, 포도농장에서 일하면서 남편의 학업을 도왔다. 남편은 시카고 해밀톤대학에서 법학공부를 하고 변호사가 되려고 했으나 인종차별로 끝내 그 뜻을 이루지 못했다. 강영승은 1922년 샌프란시스코로 와서 대한인국민회 총회장이 되었고 1932년에는 시카고로 돌아가서 교회에 열심이었다. 1919년 다뉴바에서 창립한 대한여자애국단 총부단장은 시누이 강혜원이, 그리고 박원신은 재무를 맡았다. 3대 총부단장을 맡았고 매월 독립금을 모아서 상해 임시정부로 보냈다. 일본 간장을 먹지말자는 불매운동을 벌였고, 자녀교육을 잘 시키자는 캠페인을 벌였다. 박원신은 초기 여성지도자로 시누인 강혜원과 함께 독립운동기금을 모으는데 열심이었다. 남편과 1944년 로스앤젤리스로 이주했다. 강영승은 한의사가 되어서 헐리웃에 한방병원을 개업한 첫 한인이 되었다.시카고에 있을 때에는 한인연합감리교회 부인회 회장으로 봉사를 많이 했다. 1977년 별세, 헐리웃퍼레스트 론에 잠들어 있다. 맏아들 Gene Kang, 둘째아들 James Kang 그리고 셋째 딸 Ester Kang을 두고 있다.

성명 : 박(강)원신
훈격(연도) : 애족장(1995)
운동계열 : 미주방면
출생지 : 평안남도 평양
생존기간 : 1887년 ~ 1977년

평안남도 평양 사람이다. 1905년 후일 대한인국민회 총회장을 역임한 강영승과 결혼한 뒤, 1905년 5월 도릭선편으로 남편을 비롯한 그의 가족과 함께 하와이로 노동 이민을 왔다. 하와이 도착 후, 가파올라 사탕농장과 에와 사탕농장에서 힘든 노동을 하며 남편의 학업을 뒷바라지했다. 1913년경 남편이 미본토 시카고로 건너가 법학 박사과정을 밟게 됨에 따라 시누이 강혜원과 함께 중가주 다뉴바 지역으로 이주하여 포도농장에서 시간당 15센트의 노임을 받으며 남편의 학업을 뒷바라지함과 동시에 여성독립운동에 참여하기 시작했다. 1919년 3월 2일 다뉴바 지방에서 강혜원, 문성선, 김경애 등과 함께 신한부인회를 결성하고, 회장으로 선출되어 한인 부녀자들의 민족정신 고취와 미주 항일민족운동단체인 대한인국민회의 민족독립운동을 적극 후원했다. 또한 5월 18일 미주 각 지역에 산재한 한인부인회의 운동역량을 집중 강화하기 위해 새크라멘토 한인부인회와 합동발기문을 선언함으로써 각 지역 부인회의 통합을 촉진시키는 한편, 8월 2일 다뉴바 한인장로교회에서 여성단체인 다뉴바 신한부인회, 월로스지방 부인회 대표들이 참석한 가운데 부인회 합동발기대회를 개최하고, 미주 한인사회의 통일운동기관인 대한여자애국단을 창단했다. 대한여자애국단 창단 후 재무 및 제3대 총부단장을 역임하면서 동지들과 함께 매월 3달러의 단비를 모금하여 대한민국임시정부에 송금하여 외교, 선전, 군사활동을 후원했고, 국내에 각종 구호금을 수합하여 송금하기도 했다. 이러한 활동 외에도 미주내 한인 동포 자녀들을 대상으로 민족교육을 실시하고, 일본상품 불매운동을 적극전개하는 등 조국의 독립운동에 일평생을 바쳤다. 정부는 1995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박원신(왼쪽)과 강영옥 그리고 시어머니 황마리아, 시누이 강 혜원. (1905년경)

박원신(왼쪽)과 강영옥 그리고 시어머니 황마리아, 시누이 강혜원. (1905년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