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은 1948년 8월15일 정부수립 1년후인 1949년부터 일제로부터 나라를 찾는 데 한 삶을 바친 독립유공자를 처음으로 선정해서 발표를 했다. 미주지역에서 독립운동을 한 공로로 건국훈장을 받은 독립유공자(애국지사)는 모두 309명이다. (도표1 참조) 여성은 30명. 국가보훈처는 1년에 세차례 독립유공자를 선정 발표한다. 3.1절(3월1일)과 광복절(8월15일) 그리고 순국선열의 날(11월17일)이다. 독립운동 기간은 1905년부터 1945년이며, 활동지역은 미국 그리고 멕시코, 쿠바이다. 미주 독립운동가인 이승만 박사는 1949년 건국훈장 1등급인 대한민국장을 받았다. 그리고 도산 안창호는 1962년 건국훈장 1등급인 대한민국장에 추서되었다. 2020년 3.1절까지 발표한 독립유공자는 모두 15,931명이다. (건국훈장은 모두 7등급으로 분류) 국가보훈처는 2020년 3.1절을 맞아 106명의 새 독립유공자 명단을 발표했는데, 미주 방면으로는 로스앤젤레스에서 한인연합감리교회 담임목사를 지낸 이진묵 목사, 그리고 시카고에서 독립금 지원을 한 임베시가 독립유공자로 선정되었다. 이진묵 목사는 건국포장을 그리고 임베시는 대통령장을 받았고, 남편 김경(애국장)과 함께 부부 독립유공자로 이름을 올렸다. 연희전문을 졸업한 이진묵은 1937년 미국에 유학을 왔다. 버클리의 태평양 신학교를 마친 뒤 1940년에 로스앤젤레스의 한인연합감리교회 담임목사로 부임했다. 1943년 10월 북미대한인학생회 부회장 그리고 대한인국민회 샌프란시스코 지방회 특별위원으로 독립운동에 나섰다. 그리고 1944년 4월 재미한족연합위원회에 북미대한인학생회 연합회 총회 부회장으로 참석했다. 그리고 1944년 샌프란시스코 전시정보국(Office of War Information)에서 단파 일본어방송으로 미국이 일본에 벌인 심리전에 참여했다.
이화여전을 나오고 1924년 하와이에 도착한 임베시는이승만 박사의 기독학원 일을 도왔다. 1928년 김경씨와 결혼, 시카고에서 식당을 경영하며 도산 안창호, 이승만 박사, 서재필 박사등 독립운동가의 재정을 적극 지원했다. 특별히 도산 안창호와 교류가 많았다. 그리고 임병직, 김 마리아, 유일한과 친교를 갖고 후원을 했다. 남편 김경은 1933년 시카고 세계만국박람회에 나갈 정도로 재정이 튼튼했고, 독립운동에 아낌이 없었다. 한평생 번돈을 교포와 조국을 위해서 썼고, 이번에 남편에 이어서 여성으로 독립유공자가 된 것이다. 임베시는 21살 때 금주가를 작곡, 찬송가에 실려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