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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양목

동학혁명 후 망명길, 장인환 의사 후원회 맡은 문양목

문양목문양목의 삶은 참으로 특별했다. 1869년 충청남도 서산에서 태어났다. 1894년 동학혁명이 일어나자 25세 나이에 농민군에 가담하여 활동을 했다. 동학혁명은 실패했고 관군에 잡혀가다가 구사일생으로 도주를 했다. 1905년 하와이 사탕수수농장 노동자로 미국행에 올랐다. 그리고 1년후 샌프란시스코로 이주, 초기한인사회 지도자로 활동을 시작했다. 장경, 백일규와 함께 국권회복을 목적으로 대동보국회를 결성, 회장으로 재임하면서 대동공보 사장을 맡았다. 그의 일생에 또한번 큰 변화는 샌프란시스코에서 일어난 장인환 전명운 의사의 의 친일외교 고문 스티븐스 저격 후이다. 애국재판의 후원회를 맡으면서, 한국인의 독립의지를 미국사회에 인식시켜 나갔다. 대동보국회가 대한인국민회로 통합한 후 대한인국민회 임원으로 파리평화회의에 참가했다. 1912년 신한민보 주필이 된 후에는 박용만의 군인수지를 발간하는 등 항일투쟁에 필요한 저서를 출판하여 독립운동을 측면에서 지원했다. 1911년 2월 대한인국민회 총회장에 당선되어 군인 양성운동을 적극적으로 추진했고 시베리아와 만주지역 지방총회를 설립했다. 대한독립을 보지 못한채 1940년 12월25일 71세를 일기로별세했다. 최재학씨는 2005년 「독립운동가 우운 문양목 선생의 생애」를 펴냈다. 국가보훈처는 2004년 6월 이달의 독립운동가로 문양목을 선정했다. 첫아들 핸리문은 버클리대학 의과대학 병리학과장으로 자랑스런 한인2세였다.

성명 : 문양목
훈격(연도) : 독립장(1995)
운동계열 : 미주방면
출생지 : 충청남도 서산
생존기간 : 1869. 6. 7 ~ 1940.12.25

충청남도 서산 사람이다. 일찍이 동학에 몸을 담고 있던 중 1894년 동학혁명이 발발하자 적극 참여했다. 1903년 경기도 인천에서 서당교사로 활동하면서 민족의식을 고취하던 중 일제의 한국침탈이 노골화되어 가자, 국권회복운동에 투신할 목적으로 1905년 하와이 사탕수수농장 노동자 모집에 응모하여 하와이로 망명했다. 1906년 미국 샌프란시스코로 왔다. 1907년 3월 장경, 백일규 등과 함께 국권회복을 목적으로 대동보국회를 결성하고 1907년 10월 중앙회장에 선임됨과 동시에 기관지인 대동공보사 사장 겸 발행인을 겸직하면서 국내외 동포들을 대상으로 국권회복의식을 고취했다. 1908년 3월 대한제국 외교고문인 스티븐스가 샌프란시스코에 와서 일제의 한국침략을 정당화하는 발언과 글을 신문지상을 통해 발표하자, 대동보국회에서는 미주 한인 민족운동단체인 공립협회와 합동으로 공동회를 개최하여 스티븐스의 망언에 대한 대책을 강구했다. 이 때 4인의 총대 중 한 사람으로 선정된 그는 스티븐스를 항의 방문하여 그의 발언을 취소할 것을 요구하였으나, 스티븐스가 거절하자 그를 구타하고 돌아와 그에 대한 대책을 논의했다. 그 이튿날 전명운, 장인환 의사가 스티븐스를 저격하자, 양 의사의 재판후원회를 결성하고 판사전권위원으로 임명되어 양 의사의 재판 후원 및 후원경비 조달, 변호사교섭 등을 담당했다. 공판과정을 ‘독립재판’으로 규정하는 등 재판과정을 통해 한국인의 독립의지를 구미 각국에 널리 인식시켰다. 1908년 7월 콜로라도주 덴버에서 박용만이 한인군사학교의 설립과 재미한인단체의 통합 논의를 목적으로 개최한 애국동지대표회를 적극 후원했다. 1909년경 박용만이 네브라스카주에 한인소년병학교를 설립하자 학생들을 권유 · 입교시키는 등 사관 양성을 통한 항일무장투쟁론을 적극적으로 지지했다. 1910년 로스앤젤리스에서 대동신서관이란 출판사를 설립하고 같은 해 2월 이승만의 『독립정신』을 출판하여 독립정신을 고취시키는데 힘을 기울인 그는 2월 10일 대동보국회가 대한인국민회에 흡수 통합되자 대한인국민회 총무로 당선되었고, 이듬해인 1911년 2월 북미 대한인국민회 총회장에 당선되어 일제의 한국 강점에 대항하기 위해 군인양성운동을 적극적으로 추진했다. 한편, 독립군 기지 개척과 해외 한인의 통합기관을 조직하기 위해 시베리아와 만주지역에 지방총회를 설립하기도 했다. 또한 1911년 4월에는 박용만이 저술한 『국민개병설』을 출판했고, 1912년 『신한민보』주필로 선임되자 그해 6월에 박용만의 『군인수지』를 발간하는 등 항일무장투쟁에 필요한 민족의식 선도에 앞장을 섰다. 그 후 계속 대한인국민회 중견 간부로 활동하던 중, 1940년 서거했다. 한학자인 문양목은 한시와 시조 등 우국충정이 담긴 한시와 시조 등 많은 글을 남겼다. 정부는 1995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문양목과 부인 이찬성, 3남 1녀를 두었다.

문양목과 부인 이찬성, 3남 1녀를 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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