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아버지의 기록을 찾기 위해 동생과 10여년간 중국 연변과 일본을 돌아다녔습니다, 독립운동사는 대한민국의 뿌리인데 기록이 없다고 등한시할 것이 아니라 정부 차원에서 기록을 찾아 연구하려는 노력이 더욱 필요합니다.”
독립운동가 김혁 선생의 후손인 김진도(71)씨는 15일 조부가 남긴 발자취를 찾기 위해 고군분투했던 세월을 회상하며 이렇게 말했다. 김혁 선생은 1875년 태어나 1896년 대한제국 육군무관학교에 입학했으며 고종의 친위대로 근무했다. 1907년 8월 대한제국 군대가 해산되자 고향으로 돌아가 독립운동을 하다 일본군의 표적이 돼 만주로 건너갔다.
김 선생은 만주 항일 무장독립 운동단체인 흥업단과 서로군정서에서 핵심적 역할을 하며 김좌진 장군 등 후배들을 양성했다. 북만주 지역 독립운동 단체를 통합한 신민부 설립을 주도하는 등 활발히 활동하다 1928년 일본군에 붙잡혀 징역 10년 형을 선고받았다. 혹독한 수감생활을 하던 김 선생은 1936년 고향으로 돌아갔으나 감옥에서 얻은 병으로 1939년 숨졌다. 정부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건국훈장 중 가장 낮은 단계의 훈장이다. 김씨는 “조부가 독립운동가라는 이야기는 집안 어른들에게 들었지만 어떤 분인지는 자세히 알지 못했다”고 말했다.
교사 생활을 하며 평범하게 지내던 김씨는 1970년대 말 과거 김 선생을 수행했던 이광훈 광복회장에게서 조부의 업적을 듣게 된 이후 할아버지의 흔적을 찾아 나섰다. 수소문 끝에 중국 연변대학에 독립군 관련 자료가 일부 보존돼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으나 대학에 1만 달러씩 수 차례 기부하고 나서야 자료를 검색해 수집할 수 있었다고 한다. “연변대학의 자료로 할아버지의 행보는 알 수 있었지만 객관성이 부족했습니다. 그래서 동생과 일본 국회도서관으로 향했어요. 일본 국회도서관에 있는 마이크로필름을 샅샅이 뒤진 끝에 당시 수사 자료와 관련 신문기사 등을 확보할 수 있었습니다.”
형제가 조부에 관한 자료를 모으기 위해 쓴 돈은 2억원이 넘는다고 한다. 김씨는 할아버지의 행적을 조사하며 일본강점기 훌륭한 독립운동가들이 많이 있었지만 이들의 행적을 찾는 국가의 노력이 부족하다는 점을 절실히 깨달았다고 했다. “할아버지가 상당히 영향력 있는 독립운동가였지만 기록이 국내에 없다는 이유로 정부는 무관심했습니다. 다행히 동생이 사업을 하며 경제적 여유가 있어 자료를 확보할 수 있었지만 할아버지처럼 잊힌 독립투사가 무수히 많을 것입니다. 정부 차원의 노력이 절실한 이유입니다.”
유명식기자 gija@hankookilbo.com
훌륭한 독립운동가들 많지만 찾으려는 국가 노력은 부족
만주 무장 독립운동 1세대 김혁 선생 손자 김진도씨
“기록 찾아 연구하려는 정부 차원 노력 절실”
(의정부=연합뉴스) 최재훈 기자 = “할아버지의 기록을 찾기 위해 동생과 10여 년을 연변과 일본을 돌아다녔습니다, 쓴 돈도 적지 않지요.”
독립운동가 김혁 선생의 후손인 김진도(71)씨는 15일 잊혀진 ‘조부의 기억’을 찾기 위해 고군분투했던 세월을 회상하며 이렇게 말했다.
김혁 선생은 1875년에 태어나 1896년 대한제국 육군무관학교에 입학, 고종의 친위대로 근무했다. 1907년 8월 대한제국 군대가 해산되자 고향 용인으로 내려갔고, 1919년 고향에서 3.1 운동을 주도하다 일본군의 표적이 돼 만주로 갔다.
김혁 선생은 만주 항일 무장독립 운동단체인 흥업단과 서로군정서에서 핵심적 역할을 하며 김좌진 장군 등 후배들을 양성했다. 청산리 전투 이후 일본군에 쫓겨 러시아로 갔던 김혁 선생은 소련 정부에 의해 무장해제되는 자유시 참변을 겪기도 했다.
하지만, 독립운동의 뜻을 굽히지 않고 이후 북만주 지역 독립운동 단체를 통합한 신민부 설립을 주도했다. 독립군 양성을 위해 성동사관학교를 설립하고 신민부 중앙집행위원장으로 활발히 활동하다 1928년 일본군에 붙잡혀 징역 10년 형을 선고받았다.
신의주 형무소와 서대문 형무소 등에서 8년여간 혹독한 수감생활을 하던 김혁 선생은 1936년 가출옥해서 고향으로 갔으나 감옥에서 얻은 병으로 1939년 숨졌다. 정부에서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건국훈장 중 가장 낮은 단계의 훈장이다.
김혁 선생은 만주로 갈 당시 부인 등 가족을 고향에 남겨두고 떠나며 “조선에서 버틸 수 있을 만큼 버티고 정 못 견디겠으면 만주로 나를 찾아오라“는 말을 남겼다고 한다. 일제의 핍박을 견디지 못한 가족들은 만주로 갔지만, 당시 무장투쟁으로 산속에 숨어 있던 김 장군과 만나지는 못했다. 김 장군의 아들은 만주에서 운전을 배워 생계를 꾸리다 해방 후 한국으로 돌아왔고, 이때 손자 김진도 씨가 태어났다.
“조부가 일본군 때려잡던 독립운동가라는 이야기는 집안 어른들에게 들었지만 뭐하신 분인지는 몰랐어, 건국훈장으로 집안에 도움이 되니 그냥 그러려니 했지.”
교사 생활을 하며 평범하게 지내던 김씨의 삶은 30대 후반이던 1970년대 말 완전히 바뀐다. 과거 김혁 장군을 수행했던 이광훈 광복회장이 김혁 장군의 후손을 꼭 만나고 싶다며 김진도씨를 수소문한 것.
이광훈 광복회장을 만나 할아버지의 업적에 대해 듣게 된 이후 할아버지에 대해 더 알고 싶었지만, 떠도는 이야기만 있을 뿐 한국에는 제대로 된 기록은 찾을 수가 없었다. 남은 기록이라고는 ‘김혁 장군이 존재했다. 만주 지역에서 독립운동을 했다‘는 정도에 불과했다.
수소문 끝에 중국 연변 대학에 독립군 관련 자료가 그나마 잘 보존돼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고, 김씨는 당시 사업가였던 동생과 연변 대학에 접촉하기 시작했다. 대학에 1만 달러씩 수차례 기부하고 나서야 대학은 자료 검색에 협조하기 시작했고, 김혁 선생에 대한 기록들이 어느 정도 수집됐다.
연변 대학의 자료로 할아버지의 행보는 알 수 있었지만, 객관성이 부족했다. 형제는 결국 일본 국회도서관으로 향했다. 당시 김혁 선생을 체포한 기록 등이 일본에 남아있을 것이라 예상했다. 일본 국회도서관에 마이크로필름을 샅샅이 뒤진 형제는 당시 수사 자료와 김혁 선생의 체포에 대해 보도한 신문기사 등을 확보할 수 있었다.
형제는 이렇게 모은 자료를 바탕으로 2006년 국가보훈처의 ‘이달의 독립운동가‘에 김혁 선생을 추천해 선정되면서 김혁 선생의 업적은 세상에 알려지게 됐다. 자료를 모으기 위해 쓴 돈도 2억원이 넘었다.
김씨는 할아버지의 행적을 조사하며 일본강점기 수많은 훌륭한 독립운동가들이 있었지만, 이들의 행적을 찾는 국가의 노력은 부족하다는 점을 절실히 깨달았다고 한다.
김씨는 “할아버지가 상당히 영향력 있는 독립운동가였지만 기록이 국내에 없다는 이유로 정부는 무관심했다“며 “다행히 동생이 사업을 하며 경제적 여유가 있어 자료를 확보할 수 있었지만, 할아버지처럼 잊힌 독립투사가 무수히 많을 것“이라고 말했다.
김씨 형제는 이에 그치지 않고 선생의 업적을 알리기 위해 현재 김혁 선생의 기념사업회를 구성하고, 김혁 공원과 기념관 조성을 추진하고 있다.
김씨는 “독립운동사는 대한민국의 뿌리“라며 “기록이 없다고 등한시할 것이 아니라 정부 차원에서 기록을 찾아 연구하려는 노력이 더욱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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