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가주에서 비행학교를 설립한 노백린 장군
노백린 장군은 하와이에서 군사훈련을 하고 있던 박용만 장군의 초청으로 1914년 호놀룰루에 도착했다. 그리고 국민군단 별동대 주임을 맡았다. 어렸을 때부터 항우(項羽)와 같은 대장이 될 것이라는 이야기를 들었던 노백린 장군은 타고난 무골이었다. 일본육사를 나온 뒤 구한말 무관학교 교관에 이어 노일전쟁 때에는 관전사(觀戰使)가 되어 군사경험을 넓혔다. 이어 무관학교 교장, 연성학교 교장, 헌병대장을 지내는 동안 국운이 흔들리자 친일대신들을 공격하는 한편 통음으로 울분을 식혔다. 군대가 해산 뒤 낙향했던 노백린 장군은 1914년 호놀룰루로 온 것이다. 3.1운동이 일어난 후 상해에는 우리나라 독립운동의 거성들이 구름같이 모여들어 임시정부를 수립했고 북가주에 있던 노백린 장군은 군무총장을 맡았다. 1920년 2월20일 백미대왕 김종림은 군무총장 노백린 장군과 함께 윌로스비행학교를 세웠다. 한국 청년을 주축으로 공군을 양성하여 항일전에 대비하기 위해서 였다. 북가주 백미대왕 김종림이 재정후원을 맡았고 교장을 노백린 장군이 맡았다. 그러나 이 해에 홍수로 인해 쌀농사가 망하게 되었고 6개월만에 비행학교는 문을 닫았다. 한인 공군을 양성해서 동경에 가서 일본 천황궁을 폭격하겠다는 꿈은 끝내 접어야 했다. 1920년 7월16일 노백린 장군은 호놀룰루로 향했다. 그리고 1920년 11월초 임시정부 대통령에 선출된 이승만과 함께 노백린 임시정부 군무총장은 호놀룰루를 출발, 12월8일 상해에 도착했다. 그리고 1922년 6월 임시정부 대통령 이승만의 지명으로 국무총리 대리로 선출되었고, 1923년 1월에는 국무총리로 추대되어 1924년 4월까지 임시정부를 이끌었다. 상해 임시정부로 합류한 후 국무총리를 지낸 후 52세로 1926년 1월22일 눈을 감았다. 지난날 우람했던 체구는 말년에 영양실조와 병고로 말이 아니게 변했다.한밤중에 일어나 “왜놈을 치러가자”며 고함을 질러 동숙했던 노투사를 울렸다. 1993년 한국정부는 노백린 장군 등 임정요원 5인을 동작동 국립묘지로 이장했다. 로스앤젤리스에 있는 동양선교교회 이득애 권사는 1984년 6월 상해를 방문, 처음으로 만국공원 외국인 묘역에 있는 노백린 장군의 묘지를 찾아냈고, 한국정부와 미국에 있는 가족에게 알려주었다. 1985년 9월 이광덕 목사와 안재관 목사는 다시 노백린 장군 묘지를 찾았고, 중국 관계당국과 한국 이장문제를 협의했다. 한국의 국가보훈처는 독립유공자 노백린 장군을 상해임시정부로 분류했다. 하지만 「미주 독립유공자 전집」에서는 미주방면 독립유공자로 분류를 한다. 많은 고뇌 후에 내린 결정이다. 그 이유는 미국에서 6년간 체류하며 비행사 양성으로 독립운동에 나섰고 북가주 비행학교를 설립했기 때문이다.
성명 : 노백린
훈격(연도) : 대통령장(1962)
운동계열 : 임시정부
출생지 : 황해도 송화
생존기간 : 1875.1.10 ~ 1926.1.22
황해도 송화 사람이다. 고향에서 한문을 배우다가, 상경하여 1895년 관비 유학생에 선발되어 이갑, 유동열, 윤치성 등과 함께 일본에 건너가 경응의숙을 수료했다. 이어 1898년에 성성학교를 졸업하고, 다음 해에는 일본 육군사관학교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했다. 1900년에 귀국한 그는 육군 참위에 임관되어 한국무관학교 교관이 되어 후진양성에 전념했다. 그 뒤 정령까지 승진하였으며, 육군무관학교장, 헌병대장, 육군연성학교장, 군부 교육국장 등으로 한국군 육성에 주력했다. 1905년 을사조약이 강제로 체결되면서 기울기 시작한 국권은 1907년 마침내 군대를 해산하기까지에 이르렀다. 그는 실의와 비운을 안은 채 조국의 운명을 안타까워했다. 1906년에 안창호, 이갑, 전덕기, 양기탁, 안태국, 이동녕, 이동휘, 조성환, 신채호 등과 신민회를 조직하여 구국운동을 전개하고, 만주에 독립운동 전초기지를 건설하기위한 계획을 세웠다. 또한 그는 고향인 송화에 민립학교 광무학당을 설립하고, 이어 1908년에는 김구, 최명식, 김홍량 등과 함께 해서교육총회를 조직하여 구국교육운동을 계속했다. 그러나 1914년 일제에 의해 마침내 국권이 침탈되자 미국으로 망명했다.1914년 6월 박용만 등과 하와이 오아후 가할루지방에서 국민군단을 창설하여 김성옥, 허용과 함께 별동대 주임으로서 3백여명의 독립군을 훈련시켰다. 1919년 3·1독립운동이 일어나고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자 동년 4월 10일 군무부 총장에 임명되었다. 이승만, 안창, 박용만, 이동휘, 김규식과 함께 파리강화회의에 대표로 선발되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앞으로의 승리는 하늘을 지배하는 자에게 있다고 확신하고, 1920년 2월 20일 캘리포니아주 윌로스에 비행사양성소를 설립했다. 이는 이곳 교포인 김종림 등의 적극적인 재정지원으로 이루어졌다. 설립 초기에는 비행기 2대, 미국인 기술자 1인과 비행사 6명을 교관으로 하였으나 생각했던 것만큼 큰 호응을 얻지는 못했다. 이후 임시정부의 군무총장직에 있으면서, 계속 미국에 머물러 비행학교 육성에 종사하여 1920년 7월에는 제1회 졸업생 19명을 배출했다. 한편 그는 미국에 있었으므로 임시정부 군무총장으로서는 별다른 활동을 하지 못하였으나, 1920년 1월에 “전국민이 광복군 전투 대열에 참가를 당부”하는 군무부포고 제1호를 발표하기도했다. 상해로 돌아온 그는 1921년 2월 국민대표회 문제로 이승만과 안창호가 의견을 달리하게 되자 이의 중재에 나섰으나 별다른 효과는 없었던 것으로 보이며, 안창호와 시국대책을 논의하던 끝에 임시정부가 소련과 연합해야 할 것이라는 토의를 하기도 했다. 임시정부 군무총장으로서 노태연, 도인권, 김 훈 등 무관학교 출신인 열혈청년들과 함께 일제에 대한 무력항쟁을 주창하는 한편 일반외교 활동을 통하여 조국의 광복을 성취할 수 있도록 노력했다. 1922년 1월에는 독립운동 선상에서 변심한 자와 소련 정부로부터 수령한 독립운동 자금을 공산계열의 조직을 위하여 사용한 이동휘, 김 립 등을 성토하는 임시정부포고 제1호를 국무총리 대리 신규식, 내무총장 이동녕, 교통총장 손정도 등 각료들과 함께 서명하여 발표했다. 같은 해 7월에는 국민대표회의 등의 개최에 따른 독립운동 단체의 분규와 알력을 수습하기 위해서 안창호 김덕진, 최일, 한진교, 최창식등 주요 인사들과 시사책진회를 조직하여 통일된 의견과 행동으로 조국광복에 매진할 것을 결의하기도 했다. 또한 같은 해 10월에는 군자금 모집을 위하여 군무총장 명의의 격문 등을 작성하여 경북 일원에서 군자금 모집활동을 벌이던 국내 특파원이 체포되기도 하였는데 이를 의용단사건이라고 했다. 1922년 6월에는 임시정부 대통령 이승만의 지명으로 국무총리 대리로 선출되었으며, 1923년 1월에 정식 국무총리로 추대되어 1924년 4월까지 임시정부를 이끌었다. 1924년 12월에는 대통령대리 겸 국무총리에 박은식이 추대되고 그는 다시 교통겸 군무총장에 임명되었다. 1925년 3월 대통령 이승만이 탄핵 면직되고 후임에 박은식이 당선되자 박은식은 그를 다시 국무총리로 추천하여 의정원의 동의를 거쳐 임명하였으며, 교통 겸 군무 총장에 임명되었다. 이렇게 조국의 독립을 위해서 노심초사하던 그는 상해에서 병을 얻어 1926년 1월 22일 한많은 일생을 마치게 되었다. 임시정부에서는 정부요인 및 학생 등 8백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인성학교에서 성대한 장의식을 거행하고 정안사로의 공동묘지에 안장했다. 정부는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