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지회와 이승만 박사와 함께 독립운동을 한 남궁염
남궁염은 1907년 미국으로 유학을 왔다. 한말 독립운동가이며 교육자, 언론인이었던 남궁억의 외아들이다. 1889년 3월17일 정동에서 출생한 후 배재학당에서 영어 공부를 했다. 독립협회 회원이던 아버지 남궁억이 2차례 투옥되는 것을 보고 한국을 떠나기로 마음을 굳혔다. 샌프란시스코를 거쳐 버지니아로 온 후 랜돌프 매컨 대학에서 공부를 했다. 졸업한 뒤 이승만 박사를 만나고 구미위원부에서 처음 일을 하게 되었다. 남궁염은 1924년 8월20일 이승만 박사의 소개로 우복자씨와 결혼을 했다. 이승만 박사를 후원하는 동지회가 뉴욕에서 창립될 때 참여했다. 뉴욕에 정착한 그는 3.1신보에서 일했고, 이승만 박사와 독립운동을 위한 일을 함께 해나갔다. 1949년 4월1일 뉴욕 총영사관이 개설될 때 이승만 대통령에 의해 초대 뉴욕총영사로 임명되었다. 한국에서 4.19학생의거가 일어날 때까지 12년간 뉴욕총영사로 재직했다. 총영사직을 사직한 후 1961년 11월29일 심장마비로 별세했다. 화장후 선영이 있는 강원도 홍천에 묻혔다. 장남 준, 딸 혜원, 차남 진을 두었다.
성명 : 남궁염
훈격(연도) : 애족장(2011)
운동계열 : 미주방면
출생지 : 서울
생존기간 : 1889 ~ 1961. 11. 29
1921년 북미한인학생회 대표로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청원서를 제출했다. 같은 해 미국 뉴욕에서 이승만, 이용직 등과 함께 조국광복을 목적으로 하는 비밀결사를 결성했다. 1922년 대한민국임시정부 구미위원부 위원으로, 1924년에는 위원장으로 활동하면서 재미한인들에게 독립운동자금을 모금했다. 1928년에는 삼일신보사 발기인으로 참여했다. 1933년에는 한국대일전선통일동맹의 뉴욕지부 대표 후보 그리고 1942년 이후 북미동지회 총부장, 재미한족연합위원회 경제위원을 역임하면서 재미 한인사회의 단결을 위해 노력했다. 정부는 2011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